곧은 대나무엔 기개가, 눈 속 매화엔 절개가… 간송미술관 80번째 기획전 ‘사군자’
입력 2011-05-15 17:31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은 1년에 봄과 가을, 두 차례만 기획전을 연다. 그래서 간송미술관 전시 소식이 전해지면 “또다시 봄이 왔구나” “어느덧 가을이 됐구나”하고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게 된다. 간송 전형필(1906∼62)이 수집한 한국 미술품을 바탕으로 1966년 개관한 간송미술관은 71년 가을, 겸재 정선의 작품으로 첫 전시를 연 이후 우리 미술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간송미술관이 전시를 시작한 지 40년째를 맞아 80번째 기획전 ‘사군자(四君子)’를 29일까지 개최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정신이 담긴 매란국죽(梅蘭菊竹) 100여점을 선보인다. 간송미술관이 76년 가을에 ‘사군자전’을 연 적이 있지만 소규모였고, 2005년 가을에는 ‘난죽대전’을 마련했으나 매화와 국화 그림은 빠져 있었기에 사군자 전시로는 최대 규모다.
조선시대 사군자 그림은 폭넓게 유행했지만 현재 전하는 그림들은 거의 임진왜란 이후의 것들이다. 조선 최고의 묵죽화가로 평가받는 탄은 이정(1554∼1626)은 세종의 고손(高孫)으로 많은 걸작을 남겼다. 이번에 출품된 그의 작품 5점 가운데 바람에 맞선 대나무 네 그루를 그린 ‘풍죽(風竹)’은 강인한 기상과 최상의 품격으로 사군자다운 멋과 풍류를 여실히 보여준다.
조선후기 화가 유덕장(1675∼1756)도 탄은 못지않게 대나무를 잘 그렸다. 눈 내린 초록의 대나무를 채색화로 그려낸 ‘설죽(雪竹)’은 당시 유행하던 진경산수화의 영향을 받아 이전의 대나무 그림과 비교하면 훨씬 사생적이다. 항일운동을 벌이다 투옥됐던 김진우(1883∼1950)의 난은 창칼의 뾰족함을 연상시키고, 굵고 곧은 대나무는 우국지사의 기개를 엿보게 한다.
조선 선조 때 충북 진천 현감을 지낸 어몽룡(1566∼1617)은 묵매화(墨梅畵)로 유명했다. 가지는 정갈하게, 꽃잎은 단순하게 그려낸 그의 묵매도에 대해 당시 문화인들은 “눈 속에서도 꽃을 피워 맑은 향기를 세상에 퍼뜨리는 매화의 절개를 강인하고 청신(淸新)하게 표현했다”고 평가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어몽룡의 묵매화 한 점을 볼 수 있다.
사군자 모두에 능했던 현재 심사정(1707∼69)의 국화 그림 ‘오상고절(傲霜孤節·서리를 이겨내는 외로운 절개)’은 고아한 정취를 자아낸다. 풍속화로 익숙한 단원 김홍도(1745∼?)의 사군자 그림은 회화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난과 이에 영향을 받은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1820∼98), 운미 민영익(1860∼1914)의 난을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은 “각종 위난(危難) 속에서도 절개를 지키는 사람을 군자라 일컫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곧은 생명력을 보여주는 식물을 사군자라고 부른다”면서 “기획전 40년을 맞아 사군자 소장품 가운데 각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골라 간송미술관의 정체성을 보여주려 한다”고 전시 취지를 설명했다. 입장료는 없다(02-762-0442).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