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연인들의 5·18 어긋난 현실 유머로 승화
입력 2011-05-15 17:59
차범석 희곡상 수상 연극 ‘푸르른 날에’ 리뷰
‘5월의 광주’, 비극의 역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술의 소재로 기능한다. 이미 영화 ‘화려한 휴가’나 연극 ‘짬뽕’ 등 수많은 콘텐츠가 이 사건을 제각각 조명했다. 거기에 창작극 ‘푸르른 날에’가 가세한다고 해서 더 이상 무슨 새로운 이야기를 보탤 수 있을까. 숱하게 되새김질한 역사에 어쩌면 덧없는 부연일지도 모른다. ‘푸르른 날에’가 기본적으로 통속극의 외양을 하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죽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을 우선 조명한다는 데 ‘푸르른 날에’와 이제껏 80년 광주를 다룬 다른 작품들의 차이가 있다 할 것이다. 극은 우선 80년의 생존자 둘, 정혜와 민호를 조명한다. 그리고 다도(茶道) 속에 응축된 한 서린 세월과 사연에 대해 말한다. 극 말미에는 다음 세대를 통해 미래를 이야기한다.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 미래세대의 등장이라는 줄거리가 그다지 새로울 일은 없지만, 그 같은 ‘미래’가 30년 후에야 등장한다는 건 일견 인상적이다. 통속극의 기승전결은 살리면서, 도저히 미래나 희망에 대해 말할 수 없었던 80년의 암울은 그것대로 무겁게 놔두었기 때문이다.
연극은 인물의 과거와 현재 모습이 함께 나타나며 다음과 같은 대사로 시작한다. “아, 저기 저 여자는 푸르른 날의 나, 윤정혜.” “저기 저 남자는 푸르른 날의 나, 오민호구나.” “비록 지금은 똥배도 나오고 트림도 꺼억꺼억 해대지만 한때는 열렬히 사랑했던 사이.” 관객들은 이들의 회한 섞인 대사를 통해 과거로부터 크게 어긋나버린 현재가 있다는 것, 그럼에도 이들은 죽지 않고 살아 오늘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비극이 이뤄지지 못한 사랑으로 은유되는 이야기는 수없이 많은 예술작품에서 다뤄진 레퍼토리긴 해도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기 마련.
어차피 ‘80년 광주’를 다룬 서사가 고발의 충격적인 효과를 거두는 시대는 아니고, 그로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기대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 빤한 레퍼토리를 시적인 울림이 있는 대사와 유머 섞인 표현, 적절한 완급의 속도를 통해 구현한 연극이라면 높은 점수를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극의 흐름도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한다. 그러나 배우 몇몇이 대사를 더듬는 실수를 하거나 빠르게 주고받는 대화에서 발음이 다소 부정확하게 들리는 점은 옥에 티.
10일 막이 올라 이달 29일까지 서울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공연된다. 제3회 차범석 희곡상 수상작으로 정경진이 각본을 썼다. ‘칼로멕베스’의 고선웅이 연출하고 김학선 정재은 박윤희 이영석 등이 출연했다. 전석 2만5000원. ‘푸르른 날에’를 기획한 신시컴퍼니는 극작가 차범석의 대표작 ‘산불’도 다음달 5일부터 26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할 계획이다.
양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