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 불행을 감추는 가면… 강요당한 웃음에 대한 추적기
입력 2011-05-12 17:55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소래섭 / 웅진지식하우스
국문학자 소래섭 울산대 교수는 후배의 학위논문 초고를 읽다가 ‘명랑’을 만났다. 1930년대 소설가 박태원(1910∼86)이 지식인의 ‘가장된 명랑’을 소수자의 ‘진정한 명랑’과 대립시켜 비판했다는 짤막한 언급이었다. 가짜 명랑과 진짜 명랑이라. 명랑을 말한 건 박태원만이 아니었다.
동시대 비평가 김기림(1908∼?)은 자주 명랑을 논한 ‘명랑주의자’였다. 명랑은 조소도 듬뿍 받았다. 시인 김광섭(1906∼77)은 ‘명랑이라 하는 것은 개나 물고 다닐 것’이라며 냉소했고, 소설가 엄흥섭(1906∼?)은 ‘명랑 양은 현대인에게 추파를 던지는 매소부(매춘부란 뜻)의 전형’이라고 맹비난했다.
김기림과 박태원, 김광섭과 엄흥섭의 명랑이 모두 같은 명랑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명랑은 수상했다. 한 권의 책으로 묶인 명랑에 대한 추적기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는 이렇게 시작됐다.
명랑, 식민 조선의 지배전략
명랑(明朗). ①흐린 데 없이 밝고 환하거나(날씨) ②유쾌하고 활발한 상태(감정). 표준국어대사전은 두 가지 뜻을 전하지만, 적어도 1930년대 이전의 한국인은 맑고 밝은 날씨를 묘사할 때만 명랑을 썼다. 명랑이 ‘활달한 기분’으로 탈바꿈한 데는 일제 강점기 일본어의 영향이 컸다. 갑자기 조선인들은 ‘명랑한 기분’과 ‘명랑한 사회’를 말하기 시작했다.
명랑을 키운 일등공신은 조선총독부였다. 총독부는 ‘대(大)경성 명랑화 사업’을 통해 명랑을 시대의 키워드로 만들었다. 명랑은 정부 시책이자, 개혁의 명분이었으며, 계도의 깃발이었다. 도시 외관의 명랑화가 먼저였다. 10년 새 몸집이 2배 커진 경성은 분뇨, 오물,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어 이유는 충분했다. 총독부는 경성 뒷골목과 빈민가를 정비하고 오물 투기를 단속했으며 노숙자를 거리에서 쓸어냈다. ‘외관의 명랑화’였다.
수면 아래 ‘정신의 명랑화’는 더욱 강력하게 진행됐다. 근대 소비문물이 밀려들면서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경성거리를 휩쓸던 30년대는 자유연애가 ‘근대인의 필수조건’으로 떠오르는 감정의 근대화 시기였다. 잡지 ‘삼천리’에는 ‘접문(키스) 연구’가 실리고, 다방의 초콜릿 한잔과 영화관 데이트는 청춘의 정석이 됐다. 하지만 식민 모국은 조선을 휩쓴 사랑 낭만 같은 ‘불온한’ 감정들이 불편했다. 전쟁을 앞둔 일본에 절실했던 건 애국 충성 같은 ‘명랑한’ 감정이었다.
검열이 전방위로 시작됐다. 황국신민의 자세를 고취하지 않는 유행가 영화 소설 신문 잡지에는 향락 퇴폐 불온의 딱지가 붙었다. 교육 이념은 ‘언행일치의 명랑한 인격’으로 수정됐다. 돌려 말했지만, 목표는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건강하고 순종적인 군인이었다.
명랑의 유행은 식민 지배 전략인 동시에, 자본주의 확장의 증거이기도 했다. 30년대 경성에 밀려든 자본주의는 명랑을 삶의 방식으로 강요하기 시작했다. 조선 최초의 감정노동이었다. 데파트 걸(백화점), 가솔린 걸(주유소), 빌리어드 걸(당구장), 할로 걸(전화 교환), 버스 걸(버스 안내). 경성에는 일명 ‘직업여성’들이 서비스업에 진출해 매일 명랑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명랑과 우울 사이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던’ 명랑한 캔디에게는 지독하게 슬픈 일만 닥쳤다. 김혜정의 소설 ‘독립명랑소녀’에서도, 드라마 ‘명랑소녀성공기’에서도 명랑소녀의 삶에는 장애물이 즐비했다. 70년대 모 방송국의 ‘명랑운동회’가 일요일 아침 전 국민의 애청프로였던 시절, 우리는 명랑하지 않았다. 81년 전남도가 ‘범도민 생활 명랑화 운동’이란 특수시책을 발표했을 때도 전남도민은 명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계엄군 총칼을 맞은 게 불과 1년 전이었으니.
명랑이 호황을 누릴 때 삶은 좀체 명랑한 법이 없다. 여기서 명랑의 민낯은 드러난다. 명랑은 통제를 감추는 지배의 전략이거나 포장의 기술로 강요돼왔다. 일제는 명랑하지 못한 조선의 현실을 ‘명랑화’로 감추려 애썼고, 힘겨웠던 30년대의 감정 노동자들은 ‘명랑의 가면’을 써야 생존할 수 있었다. 군사독재 시절, 정치와 사회를 명랑하게 하기 위해 우리는 ‘명랑운동회’에 동참해야 했다.
그래서 명랑은 웃음과 짝을 이루지 않는다. 명랑은 눈물이나 우울과 어울렸다. 암울한 현실과 침울한 기분 속에서 명랑은 기세를 폈다. 다만, 명랑에도 제3의 길을 모색해보려는 노력은 있었다. 김기림이 말한 명랑이다. 억지로 가장한 명랑한 감정이 아니라 과장된 슬픔과 감상을 던져버리는 태도. 김기림의 명랑은 새 것을 위해 낡은 걸 부정하는, 긍정의 정신이라고 했다.
60년 ‘문화계 명랑화의 방안’이라는 주제로 글을 청탁받은 김광섭은 이렇게 썼다. “전 사회 전 시대가 우리의 단칸방이나마 명랑하게 할 수 있는가. 오늘의 명랑이라 하는 것은 개나 물고 다닐 것이다. 미소 짓밟는 자의 의욕에 불과하다.” 강요된 명랑 주위를 떠도는 음모의 냄새를 시인의 예민한 코는 놓치지 않았다. 명랑에 관한 비판으로는 이게 압권이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