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우화집 내는 ‘연탄길’ 작가 이철환… 나는 꿈꾼다 따뜻한 연탄불 세상

입력 2011-05-11 21:35


‘초등학생 때였다. 어느 비가 많이 내리던 날, 한 손에 깁스를 하고 다른 한 손엔 우산을 들고 비바람에 우산이 날아갈까봐 안간힘을 쓰시던 아버지. 지붕을 손보러 올라가신 아버지는 깨진 벽돌 사이로 콸콸콸 쏟아지는 빗물을 막기 위해 우산을 받치고 계셨다. 양말도 신지 않은 아버지는 새벽까지 천둥 번개가 치는 지붕 위에서 그렇게 가족들의 지붕이 되고 싶으셨다.’

색색의 포스트잇과 압도하듯 성경구절이 양쪽 벽면에 빼곡히 붙어 있는 그의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이미 그곳은 문밖의 세계와 본질이 전혀 다른 곳임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앨리스가 자명종 시계를 들고 허겁지겁 달려간 토끼 뒤를 따라 토끼굴로 들어갔다가 ‘이상한 나라’에 도착한 것처럼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들어갔다. 최근 서울 방학동 자택에서 가족사랑, 이웃사랑 그리고 삶에 대한 희망을 전하는 ‘연탄길’의 저자 이철환(49·수유동교회 집사) 작가를 만났다. 그에게서 아버지로 살아가는 이야기와 그만의 따뜻한 작품 세계에 대해 들어보았다.

아버지, 단 한번의 소통

집필하는 틈틈이 강연에 나가는 이 작가. 강연에서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아버지를 떠올린다.

“아버지는 제게 공부 열심히 해라, 성실하게 살아라, 독서 열심히 하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아버지를 생각하면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하고 책도 열심히 읽어야 했어요. 저는 아버지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다 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했거든요. 그건 아버지와 단 한번의 소통 때문이었어요.”

그가 초등학생 때 아버지가 평생 하던 고물상의 문을 닫으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그의 부친은 절망한 상태에서 생계 때문에 우유배달을 하다 팔을 다쳐 깁스까지 하셨다. 어느 비가 많이 내리던 날,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져 집안이 어수선했다. 어머니는 진작 손보지 않은 것에 대해 아버지에게 원망했다. 아버지는 밖으로 나가 늦도록 돌아오지 않으셨다. 어머니 누나 형과 아버지를 찾아 헤맸다. 한참 후 지붕 위에 쪼그리고 앉아 계신 아버지를 발견했다. 지붕 위에서 새벽이 될 때까지 가족을 위해 우산을 받치고 계셨던 아버지는 그의 삶에 영원한 스승으로 자리했다. 그런 아버지는 아직도 자식과 손자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고 계신다. 아버지 이야기는 2005년 ‘행복한 고물상’에 담아냈다.

“우리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하다 제 감정이 섞일 때 아버지가 생각나요. 그럴 때 제가 조금만 아이들의 마음으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제 위주로 생각하거든요. 아버지는 당신의 중심을 상대방의 중심으로 갖다 놓았기 때문에 배려할 수 있었던 거였는데 저는 그렇지 못할 때가 있어요.”

편지와 꽃 한 송이

이제 아버지의 위치에 선 그는 말이 없던 아버지와 달리 손글씨로 쓴 편지로 아이들과 소통한다. 아이가 힘들 때마다 편지를 써 학교에 간 후 방에 놓아둔다는 그. 고등학교 2학년인 큰 딸 슬은 이 작가가 어떤 말을 해도 다 받아준단다. 아버지에게 대들고 싶어도 편지들이 “아빠에게 대들지 마”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일 거라고. 또 이 작가는 꽃 한 송이를 사와 병에 꽂아 책상 위에 놓아둔다. 아이는 한번도 꽃이 예쁘다거나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어떤 말을 하고 싶어도 자기에게 꽃을 사다주는 아빠라고 생각하면 눌러주는 게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이에게 말로 하는 것과 편지를 주는 것은 너무도 다르다고 했다. 때에 따라서는 부모로서 억지를 부린 적도 있었다. 그럴 때 미안하단 말보다 편지를 써 ‘아빠가 이거 너무 지나쳤던 거 같아. 아빠가 부끄럽게 생각해. 아빠가 미안해’ 하면 그걸 받아들이는 아이는 굉장히 크게 감동한단다.

“아이에게 뭘 가르치려고 글을 쓴 적이 없어요.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때, 위로하고 싶었을 때, 격려하고 싶었을 때 썼어요. 우리도 지지고 볶고 싸워요. 더 중요한 건 그 다음이에요. 자신을 내려놓고 그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소통은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거기가 진정한 소통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거룩의 모습은 선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이 공존할 때 거룩의 모습이 된다고 덧붙였다.

정신이 물질을 이기는 세상

이 작가는 작품을 쓸 때도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는 작품을 통해 자신을 위로하고 싶었고, 세상을 위로하고 싶었다. 세상을 향해 따뜻한 시선으로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사랑을 말하고 싶었다.

그는 자본주의 논리로 획일화되어가는 세상이 위태로워 보였다. 윈윈이란 말은 그래서 좋은 말 같으면서도 무서운 말이라고 했다.

“너도 좋고 나도 좋다는 게 윈윈인데 거긴 조건이 붙는 것 같아요. 내가 좋아야만 너도 좋다는 거잖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자본의 논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더 많이 개입되는 것이 무서워 보여요.”

이 작가는 언젠가 TV에서 명동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다음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으면 좋겠는가’라는 설문조사를 하는 것을 보았다. 이때 압도적으로 1등 한 대답이 ‘정신이 물질을 이기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란 항목이었다. 결국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도 정신이 물질을 이기는 세상, 그럴 때 비로소 인간성이 회복될 수 있고 우리가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것이 그가 작품에서 하고 싶은 말이다.

애증의 ‘연탄길’

2000년 출간된 ‘연탄길’이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2010년 초연 이후 지난달 22일부터 오는 22일까지 서울 용산아트홀 대극장 ‘미르’에서 공연 중이다. 2012년에는 뮤지컬 대본으로는 대한민국 최초로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수록될 예정이다. 그에게 ‘연탄길’은 7년이란 준비기간을 거친 끝에 탄생한 사랑스러운 작품이면서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불덩이가 올라오게도 하는 증오의 대상이다.

“학원 강사를 하며 집필하다 보니 과로로 이명이 생겼어요. 이것 때문에 우울증이 왔고 우울증이 깊어지니까 자살충동이 왔어요. 3년 동안 세상과 단절하고 살았어요.”

1999년부터 지금까지 12년째 단 1초도 멈춘 적이 없다는 고음의 쇠 깎는 소리. 그는 우울증, 불면증, 자살 충동으로까지 몰아갔던 이명과 2005년부터 친구가 됐다. 턱없이 교만해진 인기 강사 자리를 내려놓고 아무 보수도 없는 서울 쌍문동 ‘풀무야학’의 강사를 선택했다. 학업에 대한 열망을 품고 사는 그들을 보며 글을 쓸 수 있는 마음의 처소를 마련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탄길나눔터기금’을 통해 책의 수익금 전액 또는 10%를 기부하는 전업작가가 됐다.

최근 그의 관심사는 글과 그림의 화법이다. 그림을 배우지 않은 그는 그동안 본인 작품의 표지와 삽화를 그려왔다. 오는 6월 글보다 더 많은 그림을 담은 우화집의 발간을 앞두고 있다.

“다음 책이 그림으로 세상에 나갔을 때 독자들이 이걸 어떻게 해석해 주실지 궁금해요. 글과 그림의 화법을 적용해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것들을 더 해보고 싶어요. 독자들이 징검다리를 놓으면서 스스로 걸어갈 수 있는 그런 책이요.”

인간의 욕망, 이중성에 대하여

우화집에서는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더 넓혔다.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욕망과 이중성에 대해 긍정하게 됐다. 인간의 욕망이나 이중성도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는 인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인간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저 사람도 나와 똑같은 욕망을 가진 사람이라고 인정했을 때 비로소 소통의 첫발도 뗄 수 있고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도 될 수 있으며 그를 전도할 수 있는 시작점도 될 수 있어요.”

인간의 이중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고 인간의 이중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상대방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소통을 위한 한 걸음도 시작될 수 있을 것 같고 위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욕망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 말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 말자. 어쩌면 그것이 우리들의 모습이고 우리들의 그늘인데 그 그늘을 인정하는 것, 그 겸손함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세월이 차곡차곡 쌓여갈수록 깊이를 더해가는 그의 차기 작품이 기대되고 궁금해진다.

■ 연탄길

우리 이웃의 소박한 삶과 나눔을 담은 ‘연탄길’은 2000년 1권을 시작으로 총 3권이 출간돼 360만명이 넘는 독자가 읽었다. 에피소드 중 ‘아름다운 이별’은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 대만과 일본에 수출되어 한국을 넘어 아시아에서도 널리 읽히고 있다. 특히 일본에서는 지난 2월 인기 가수 초난강이 번역해 2개월 만에 15만부가 나갔다.

글 최영경 기자·사진 이병주 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