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만에 함께 사니 거저 행복합네다” 탈북 자매 조수진·수아씨의 남한살이
입력 2011-05-11 18:05
서울 여의도에서 10일 만난 탈북 5년차 조수아(35·청진의대 졸)씨는 연방 “행복합네다”라고 말했다. 북한에서 1985년 헤어졌던 언니 조수진(39·연세대 사회복지학과 3년)씨를 25년 만에 만나 함께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갖은 고생 끝에 남한에 온 언니라 더 감회가 컸다.
“인민학교(초등학교) 때 기술자로 일하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형편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전교 1등 하던 똑똑한 수아가 만 아홉 살 때 유공자자녀 학교를 거쳐 평양의 한 부잣집 외동딸로 가게 됐지요. 그때부터 우리 자매는 함께 살지 못했습니다. 한두 번 먼발치에서 본 적도 있지만, 잠시뿐이고 우리 자매는 항상 ‘따로 인생’이었지요. 자유로운 남한 땅에서 이렇게 만나 회포를 풀다니 정말 꿈만 같습니다.”
애틋한 자매의 남한별곡
내년 1월 치러질 의사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수아씨는 지난해 4월 자영업을 하는 남한 남자와 가정을 꾸렸다. 그녀의 꿈은 통일 후 북한의 의료체계를 한국처럼 선진화할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는 것이다. 2009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의료선교대회에 아시아 대표로 참석, 북한의 낙후된 의료환경 개선을 호소했다. 지난해엔 탈북민 최초로 ‘대한민국 인재상’을 대통령으로부터 받기도 했다. 탈북민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장애인 봉사활동을 실천해 온 공로다. 그동안 컴퓨터, 한자, 병원코디네이터, 상담사 1·2급 등 자격증도 11개나 땄다.
언니와 함께 ‘자유의 땅’ 남한에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것이 그녀의 바람이다. 수진씨는 지난 해 10월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하나원)를 나와 적응 중이다.
“97년 탈북한 언니가 고생을 심히 했습니다. 저보다도 더 많이…. 중국에서 식당 일을 하다 신경이 끊겨 손을 제대로 못 쓸 정도예요(눈시울이 붉어졌다). 언니가 좋은 남자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렸으면 합니다. 북의 가족이 너무 보고 싶습니다….”
수진씨는 현재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다. 형편이 어려워 학교가 위치한 서울 신촌에서 경기 부천 집까지 걸어 다닌 적도 있다. 수진씨의 꿈은 불쌍한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복지관에서 일하는 것이다.
영화 ‘타짜’ 노출 보고 밥 못 먹어
수진씨는 남과 북의 언어습관이 많이 다르다며 손사래를 쳤다. ‘A4용지’ ‘이슈’ 등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될 외래어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대학 친구들이 어느 날 ‘스쿼시’하러 가자고 해서 깜짝 놀랐지 않습니까. 전 수컷과 성관계를 맺으러 가자는 말로 들렸습니다(웃음). 근데요, 앞으로 고유한 우리 민족어를 좀 더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미니스커트를 입는 여성의 노출도 심하다고 했다. 며칠 전 영화 ‘타짜’를 봤는데 노출 장면이 심해 밥을 며칠 동안 못 먹었다고 했다.
“마네킹 속옷은 왜 나와 있습니까? 속옷은 안에 입는 옷인데 밖에 나와 있다니…. 여성이 상품화된 것은 아닌지요. 부끄럽습니다. 우리 민족의 특성인 소박하고 고요한 것이 좋지 않습니까. 순수성을 좀 살렸으면 합니다.”
언니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수아씨가 화제를 돌렸다.
“북한에는 가정의 달도 없고 어버이날도 없습니다. 오직 김일성·김정일 날만 있는 나라이지요. 가족간에도 입 조심을 해야 하는 나라, 체제 비판을 할 수 없고 표현의 자유가 없는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한국교회와 사회가 북한 주민들의 인권 개선에 나서야 합니다. 저희의 작은 힘도 보태겠습니다.”(무언가를 작심한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북한 감옥 생활과 극적 탈북
북한에서 외과의사로 근무하던 수아씨가 남한에 온 것은 지난 2006년. 더 큰 세상에 대한 호기심에 친구들과 국경을 넘어 몇 시간 중국을 구경한 것이 영영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여기에다 중국에서 남한 사람에게 통역을 한 죄가 더해져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숱한 고문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탈출에 성공했고 중국을 거쳐 혈혈단신으로 남한에 왔다.
수진씨의 탈북 과정도 극적이다. 공장 노동자로 근근이 살아가던 수진씨는 두만강을 건너 탈북해 중국에서 살다가 태국을 거쳐 2010년 남한에 왔다. 첫사랑에 실패하고 옷 장사로 밀무역을 하다 감옥에 가게 된 것이 탈북 사연이다. 중국에선 공안을 피해 은신처를 전전하며 허기를 채워야 했다. 중국 옌볜 이모집에 놀러 갔다가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당해 2년 동안 고생도 했다.
수진씨는 “어린 시절 황해도 고향에 살 때 남한에서 날아온 삐라와 라디오 남한 방송을 들으며 남한이 잘사는 곳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며 “지금까지 속아 온 세월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살아 갈 것”이라고 밝혔다.
행복한 신앙생활
자매는 단 한 번도 ‘하나님’ ‘성경’ ‘예수 그리스도’란 단어를 들어 본 적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매를 무신론자로 살도록 버려두지 않으셨다. 중국에서 피신을 도와준 이가 교회 목회자들이었던 것이다. 목회자와 교인의 정성스런 보살핌 속에서 성경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북한에서는 기독교는 물론, 종교라는 것 자체가 없습네다(억울한 듯 더 억센 북한 말로). 거저 김일성, 김정일이 하나님이고 구세주이지요. 위대한 영도자 수령, 김일성 장군, 절세 영웅 등등…. 정말 말도 안 되는 웃기는 얘기지요. 이제라도 진정한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났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네다….”(수아씨)
자매는 요즘 서울 목동 지구촌교회(조봉희 목사)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주일 예배는 물론, 새터민 예배, 셀 모임에도 열심이다. 특히 수아씨는 전국교회와 대학, 중·고등학교 등을 돌며 300여회의 신앙 간증을 했다.
“외롭고 힘들 때마다 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이 기도해 주시고 때론 물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제가 받은 사랑을 저보다도 어렵고 힘든 사람에게 돌려주고 싶습니다.”
자매의 이구동성이다.
글 유영대 기자·사진 김지훈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