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 켜는 ‘중국집 사장님’ 서울 방산시장 ‘을지반점’ 김민환씨

입력 2011-05-11 18:03


상냥했던 아들은 2007년 9월 사고로 죽었다. 17세. 그의 아버지는 괴로워하다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추상 같은 아버지였기에 더 죄스러웠을 것이다. 이듬해 아버지는 바이올린을 배웠다. 손끝마다 물집이 부풀고 굳은살이 돋았다. 아들을 잊는 방법이었다. 소음은 선율이 됐다. 교회에서 처음 연주한 날, 무딘 곡조에도 청중은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 김민환(48·서울 방산시장 ‘을지반점’ 사장)씨의 레퀴엠은 그렇게 시작됐다.

8년간 돌아가지 못한 가출

김씨는 3남 중 장남이다. 강원 양양군의 벽지에서 자랐다. 지형이 도롱뇽을 닮아 ‘도롱골’로 불리는 마을이었다. 김씨가 국민학교(지금 초등학교) 5학년이던 1974년 가을 아버지는 스스로 목을 맸다. 아버지는 형제들에게 꿔 준 돈을 받지 못해 번민했었다고 후일 어머니에게 전해 들었다.

아버지 죽음 직후 서울 사촌들이 방문했다. 빗질한 머리칼과 하얀 피부, 양복과 구두는 부러웠다. 김씨는 찢어진 옷을 기워 입었고 얼굴이 검었다. 사촌들이 떠나고 서울만 생각했다. 어머니 옷 주머니에서 5000원을 훔쳐 가출했다. 완행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서울 마장동 버스터미널이었다. 일대는 함석과 기와로 만든 지붕이 집들을 덮었고 듬성듬성 논이 보였다. 중랑천은 폐수로 새카맸다.

길을 잃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터미널은 나타나지 않았다. 늦가을 해는 짧았다. 차비를 쓰고 남은 4000여원으로 50원짜리 과자를 사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기차가 다니는 다리 밑에서 잤다. 밤공기는 차고 모기가 많았다. 기차에서 쏟아지는 폐석 가루를 뒤집어쓰고 모기에 뜯기며 밤새 울었다.

다음날 길에서 넝마주이들과 마주쳤다. 김씨에게서 돈을 뺏고 앵벌이를 시켰다. 주로 남의 집 앞마당에서 물건을 훔쳐오는 일이었다. 빨랫줄에 걸린 속옷이라도 걷어 와야 밥을 줬다.

며칠째 얻어맞고 배곯던 김씨는 고소한 냄새를 따라갔다. 서울역 인근 중식당이었다. 김씨는 행색이 거지였다. 직원이 욕하며 내쫓으려 했다. 사장 부부가 김씨를 거뒀다. 숙식을 제공하고 청소를 맡겼다. 불광동 중식당으로 옮긴 김씨는 제 몸통만한 나무통을 들고 배달을 다녔다. 엎어지기 일쑤였다.

이어 일한 경기 파주시 금촌동 중식당은 커서 일이 혹독했다. 우물물을 길어 물탱크를 채우는 일부터 시작했다. 화덕에 불을 피우고 재를 퍼냈다. 그러면서 어깨너머로 요리를 배웠다.

금촌동 중식당 주인이 82년 봄 양양 도롱골을 찾아내 김씨를 데려다 줬다. 김씨는 실종자로 신고돼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김씨가 돌아왔다고 동네사람들이 구경 왔다. 경찰은 진술을 받아갔다.

중국집 그리고 아들의 죽음

김씨는 아내 강선자(47)씨를 87년 가을 만났다. 강씨는 제수의 친구였다. 전남 곡성군 출신으로 서울서 언니와 살았다. 친구 아이의 백일을 축하하러 양양에 갔다가 김씨를 소개받았다. 김씨는 “서울 가는 차표가 매진됐다”며 눌러 앉힌 뒤 설악산과 동해를 여행했다. 이듬해 결혼했다.

가장이 된 그는 건축현장에서 미장 일로 생활비를 벌었다. 건설 경기가 가라앉자 97년 속초시 교동에 중식당 ‘현대반점’을 차렸다. 김씨는 가출 시절 배운 요리 솜씨를 선보였다. 문전성시를 이뤘다.

2007년 9월 21일 배달직원이 무단결근했다. 오후 4시쯤 식당 전화가 울렸다. 강씨 대신 그릇을 찾아오겠다며 오토바이를 몰고 나간 아들 우림군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 집 배달직원이 도로에 넘어져 있어요.” 사고 현장을 지나던 운전자가 오토바이에 적힌 식당 전화번호로 연락한 것이었다.

우림군은 미시령으로 뻗은 왕복 4차로 도로 가운데 인도 쪽 차로에 쓰러져 있었다. 강씨는 “어쩌다 사고가 났느냐”고 짜증냈다. 우림군은 갈비뼈 부위를 잡고 아파했다. 인도의 턱에 앞바퀴가 뒤틀리면서 운전대가 가슴을 친 것으로 경찰은 추정했다. 우림군은 응급차에 실려 속초병원으로 옮겨졌다.

의사가 강씨를 불러 “간이 산산조각 나서 살기 힘들겠다”고 했다. 우림군이 듣고 강씨에게 왔다. “엄마, 난 괜찮아. 울지 마.” 우림군은 수혈 주머니를 달고 강릉아산병원으로 이송됐다. 병원 마당에 도착했을 때 우림군은 핏덩이를 토했다. 혈압은 급락했다. 의료진이 응급수술에 들어갔다.

아버지 김씨가 달려왔을 때 수술실 밖으로 들리는 비명은 처절했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우림군은 의식이 없었다. 배는 피가 차서 임신부처럼 부풀어 있었다. 우림군은 이틀 뒤 심장이 멎었다.

연주로 당신도 위로하고 싶다

김씨는 아들 생전에 엄했다. 아들이 모질지 못해 강하게 키우려고 했다. 우림군이 한밤중 오토바이를 타고 오락실에 갔을 때 김씨는 식당 앞에 엎드리게 하고 몽둥이로 볼기를 팼다. 밤에 오토바이를 타지 말라는 질책이었다. 우림군은 다음날 안방 화장대에 ‘아빠 죄송해요’라고 적은 쪽지를 붙였다.

김씨 부부는 10월 초 식당 영업을 재개했다. 그만두려는 김씨를 주변에서 말렸다. 바쁘게 살아야 잊혀진다고들 했다. 부부는 억척같이 일했다. 망각은 의지의 영역이 아니었다. 텔레비전을 보면 아들 웃음이 들리고 문을 보면 아들이 들어오는 듯했다. 수화기를 들면 “나 우림인데”라고 할 것 같았다.

김씨는 배우다 포기했던 바이올린을 2008년 초 다시 잡았다. 영업 후 인근 학원에서 교습을 받았다. 자정이 넘도록 연습했다. 바이올린을 켤 때 아들의 죽음이 잊혔다. 김씨는 “현실이 아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몰려올 때 바이올린이 위로가 됐다”고 말했다. 연주는 5, 6개월째부터 들을 만해졌다.

김씨는 교회에서 첫 연주 기회를 얻었다. 딸 은주양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바이올린을 켰다. 복음성가 ‘이와 같은 때엔’과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연주했다. 눈물을 흘리는 교인이 보였다.

김씨 가족은 지난해 4월 서울로 이사했다. 아들을 잊지 못하는 아내 강씨가 환경을 바꾸고 싶어 했다. 김씨 부부는 서울 주교동 방산시장의 을지반점을 인수하고 제기동의 한 교회에 출석했다. 을지반점은 선교사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으로 봉사한다. 선교사들이 무료를 부담스러워하는 점을 감안해 1000원을 받는다.

“아들을 보내고서 다른 사람의 시련도 제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힘든 상황에 처한 분들을 찾아가 위로하는 음악 치료사가 되고 싶습니다.” 9일 밤 영업을 마치고 만난 그는 텅 빈 을지반점에서 찬송가 ‘나의 갈 길 다 가도록’을 연주했다. 귀가하던 이웃 상인들이 걸음을 멈췄다.

글 강창욱 기자·사진 홍해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