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9) 협심증 위기 통해 선교 새 각오 다져
입력 2011-05-11 17:48
2003년 만리장성에서 갑자기 쓰러진 나는 서울 아산병원으로 긴급 후송된 뒤 바로 입원했다. 의사는 협심증으로 쓰러진 것이라며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이라고 했다. 곧장 수술에 들어갔다.
“서 선생. 중국에서 죽지 않고 살아 온 것만으로 감사하세요. 조금만 처치가 늦었으면 결과에 대해 누구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지금 인생을 두 번 사시는 것입니다.”
의사의 말을 들으며 내 삶은 이제 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도 협심증으로 쓰러졌다 병원에 빨리 가지 못해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중국에서 쓰러졌는데 생명을 건진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절절히 느꼈다. 막힌 곳을 뚫어주는 스탠스 수술을 두 곳이나 받고 나니 죽음을 향해 걸어가다 중간에서 되돌아온 것 같았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너 이래도 미적거릴 것이냐?”고 나무라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확신이 들면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이 떠올랐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에 순종해 수술 후 23일 만에 한국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중국으로 떠났다. 아내와 딸이 들어와 있었으니 나와 아들만 들어가면 됐다. 나 스스로를 다짐하는 의미로 구호 하나를 만들었다. 그것은 “오직 예수, 오직 순교”였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고 했으니 순교할 각오로 사역하면 못할 것이 없다는 스스로에 대한 각오였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나의 궁극적인 비전은 북한선교이다. 그런데 그 중간과정으로 조선족을 선교하게 하시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조선족들은 수시로 북한을 드나들 수 있고 친인척 또한 그 땅에 있기 때문이었다.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의 하나인 조선족은 우리의 말과 글을 잃지 않았고 부지런함과 근면함으로 옌볜을 중심으로 조선족자치주를 형성, 전통문화를 이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도 도시화가 이뤄지면서 많은 조선족들이 일자리를 찾아 한국 또는 중국의 또 다른 대도시로 몰려들게 되었다.
심장수술 후 중국 땅을 밟은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40일 기도였다. 내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을 찾고 마음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 기도 29일째 되던 날 마음속에 주님이 분명한 응답을 주셨다.
“네가 지난 8년간 중국을 오가며 조선족 선교를 한 것은 바로 이때를 위함이란다. 또 한국에서 전도자로 훈련받고 노인선교와 청량리전도, 신학공부 등 한 것 모두가 이때를 위함이란다. 이제 너는 네 동포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복음을 나누어라.”
‘감사합니다. 주님. 한국에서 철저히 훈련받게 하시더니 결국 이곳으로 완전히 불러 주셨군요. 사명에 합당한 사역을 이루고 열매를 맺게 해 주세요. 중국의 영혼들을 품고 사랑하길 원합니다.’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베이징에는 무작정 일자리를 찾아온 조선족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주로 회사주재원이나 사업자, 유학생들이 많이 사는 한인타운 왕징(望京)이란 곳에 모여 있었다. 조선족 여자들은 가정부나 식당종업원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남자는 주로 잡역부로 일당을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먼저 베이징에 와 있던 아내는 그 사이 집을 구해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홈스테이(하숙)를 시작했다. 당시 한국에서 중국 붐이 일면서 유학생들이 많아졌던 것이다. 아내가 아침저녁 식사를 해주고 빨래까지 해주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내 어깨가 좀 가벼워지는 듯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