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서마태… 근데 내가 누구지?”… 美 양부모 출산으로 버림받은 청년 이야기

입력 2011-05-10 21:57


형은 독특한 외모가 싫었다. 여느 아이와 다른 짙은 눈썹과 큰 코를 가리키며 쑤군대는 어른들이 미웠고, “야, 코쟁이! 영어 한번 해 봐”라는 동네 개구쟁이도 눈엣가시였다.

‘다문화 가족’이라는 말을 떠올릴 정도의 세련미가 없던 1970년대, 형의 유년기는 그랬다. 미군 병사를 사랑한 미혼모였던 엄마의 삶도 팍팍하긴 마찬가지였다.

‘영어 모르는 이방인’의 삶이 버거웠던 형은 차라리 ‘우리 말 모르는 이방인’이 낫다고 여겼다. 엄마도 무언가에 쫓기듯 새로운 미군 병사와의 사랑을 이어갔다. 그러나 1978년 2월 내가 태어나자 생부는 말없이 떠났다. 흐느끼는 엄마에게 형이 다가갔다. “엄마. 동생은 다른 나라로 보내자, 응?” 아직 눈도 못 뜨는 나를 안고, 서울 은평천사원 문을 두드린 건 형이었다. 형이 열일곱 되던 해였다.

그로부터 25년 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한 소도시 이탈리안 레스토랑. 한바탕 손님을 치른 후 계단에 걸터앉은 내게 동료가 메모지를 건넸다. ‘형으로부터. 전화 부탁’이라는 간단한 글귀와 함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형? 누구지?” 송신음이 울리고,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I’m your brother, the real brother(네 형이야, 친형).” 형은 그렇게 나타났다. 내겐 형에 대한 기억이 없다. 아니 존재도 몰랐다. 그는 1993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로 이민을 떠나왔다. 이민 10년 만에 날 찾아낸 것이라고 했다.

형은 미국에서의 내 삶을 몹시 궁금해했다. 난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한국에 파견 나온 미군 장교에게 입양돼 미국으로 건너왔다. 오랜 불임에 고민했던 양부모는 입양절차가 까다롭고, 오래 기다려야 하는 미국 대신 한국 아기를 선택했다고 한다.

처음엔 내게 주어진 가족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날 입양한 이듬해부터 차례로 두 남동생과 여동생이 태어나면서 나는 서서히 ‘가족’에서 구분되기 시작했다. ‘삼촌’의 결혼식 때도 집에 남겨졌다. 열여섯 때부터는 아예 미국 보육시설 신세를 져야 했다.

그래도 보란 듯이 살고 싶었다. 성년(만 18세)이 된 후 밥벌이에 나서면서도 펜을 놓지 않았다. 열아홉 때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한 영상전문대학에 합격했다. 그러나 학교당국과 장학프로그램 협의를 하던 중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난 미국 시민이 아니라 장학금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2000년 이후 발효된 아동시민권법에 따라 미국인 가정에 입양된 외국인 아이는 자동으로 미국 국적을 얻지만 그 이전에 입국했을 경우 귀화절차를 밟아야 한단다. 양아버지는 “깜박했다”는 말만 남기고 외면했다. 지난해 엄마의 나라 한국은 내게 재외국민 자격으로 여권을 발급해줬다.

누군가에겐 국적이 선택에 불과하다. 세금 덜 내는 나라를 골라 다녔다는 어느 선박회사 사장에게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내겐 국적은 새로운 시작이다. 나는 지난 9일 서울 신촌동에 섰다. 공허했던 매튜 쉐러가 아닌 서마태라는 이름으로. 지난 30년간 내겐 꿈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젠 나와 같은 입양아를 위한 삶도 꿈꿔 본다. 이 땅엔 여전히 혼혈, 장애, 미혼모 자녀를 이유로 해외입양을 떠나는 아기가 한 해 1000명이 넘는다고 하니까.

정동권 기자 danch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