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조미자] 알맹이와 껍데기

입력 2011-05-10 17:56


어버이날을 앞두고 떨어져 사는 딸이 연락을 했다. 언제 집에 가면 좋으냐는 것이다. 시간을 내려 해도 딸애와 일정이 맞지 않았다. 365일 다 어버이날이니 아무 때나 오라고 했다. 다음날 집으로 온 딸은 나더러 그렇게 으스스한 말을 해도 되느냐고 했다. 회사 직원들한테 “우리 어머니는 365일 날마다 선물 사가지고 오라신다”고 말해 한바탕 웃었단다.

오랜만에 온 딸은 안방, 주방으로 살림살이를 돌아본다. 애완견 목욕은 제대로 시키는지 물어본다. 그러더니 애완견 간식 캔을 들고 읽다가 휙 버린다. 유효기간이 지났다는 것이다. 화장품이 쓸만한 게 있는지 화장대를 눈여겨본다. 아이크림이 없는걸 알고 제가 쓰던 걸 슬며시 놓는다. 그러더니 스킨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더 쓸 수 있는데 왜 버리느냐고 집어 드니, 화장품도 오래 되면 곰팡이 피고 피부 상한다며 스킨을 꺼내는 내 손을 붙든다. 목욕용 파우더는 지금 버리면 또 싫은 소리 할 게 뻔하니 다음에 버려야겠다며 예약까지 해 놓는다.

딸에게 외할머니 집에 들렀다 가겠느냐고 했다. 사실 아침에 어머니에게 전화하니 길이 잔뜩 밀릴 거라며 오지 말라고 했다. 어쩌면 오지 않을 줄 알았던 딸이 손녀를 데리고 들어서니 어머니 얼굴은 금방 생기가 돌았다. 기름값 비싼데 뭐하러 왔느냐면서도 뚝배기에 청국장을 끓여 내왔다. 미나리물김치가 잃었던 입맛을 돌려놓고, 새콤달콤한 고춧잎무말랭이로 밥 한 그릇을 단번에 비웠다. 창밖으로 아파트들이 보였지만 맨드라미와 봉숭아가 핀 시골집 툇마루에서 먹는 기분이었다.

나는 베란다로 나가 살림살이를 돌아보았다. 지난겨울 추위에 풍란이 죽어 있었다. 왜 이런 화분을 아직도 버리지 않았느냐며 꺼내들었다. 이번에는 어머니 방으로 갔다. 퇴색된 꽃병, 촌스런 커피 잔, 화장품들이 세월의 먼지를 켜켜이 이고 있었다. 이렇게 유행 지나고 손때 묻은 걸 쓰면 더 나이 들어 보인다며 쓰레기통으로 버렸다. 하나씩 둘씩 버리며 나는 문득 딸애가 집에 와서 한 행동을 그대로 하는 자신을 보고 속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집에 간다고 하자 어머니는 바나나와 인절미, 쑥떡, 감자를 주섬주섬 챙긴다. 그러더니 10킬로짜리 쌀을 사다 놓았으니 가져가라며 들었다. 내가 쌀을 들 테니 애완견을 안으라고 하자 어머니는 쌀이 더 가볍다고 했다. 이 무슨 말인가? 애완견은 7.5킬로인데. 어머니는 자식이 먹을 쌀이 더 소중했던 거였다.

차에다 짐을 내려놓고 나는 어머니가 준 과일과 떡을 딸에게 주었다. 쌀도 가져가겠느냐고 하자 요즘 밥만 먹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핀잔을 준다. 어머니 물건을 버리느라고 현금이 든 봉투를 진열장에 두고 오는 걸 깜빡 잊어버렸다. 봉투를 드리니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도통 받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억센 힘이 나오는지.

시동을 걸고 앞을 보았다. 룸미러 속으로 허청허청 걸어가는 어머니의 굽은 등과 빈손이 보였다. 바람이 불면 곧이라도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당신은 껍데기의 모습이었다. 알맹이는 온데간데없이 모든 것을 다 내어준….

조미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