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8) 여객항공기편으로 車 미션을 옮기다

입력 2011-05-10 17:57


딸 선화가 베이징에 있으니 아내와 자주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갈 때마다 우린 조선족들을 만나 틈틈이 전도했다. 사역의 기틀이 마련되는 듯했다.

그 무렵이었다. 단기팀과 중국을 가기 전 날, 베이징의 한 집사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자동차 부품을 좀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자동차 부품이 없어 운행을 못하는 승합차가 있다는 것이었다. 간단한 부품이라고 생각하고 쉽게 승낙했다.

그런데 공항에서 택배 기사로부터 부품을 받고 나니 입이 벌어졌다. 3단 이민가방 속에 든 부품은 미션이었다. 90㎏ 무게의 쇳덩어리였다. 자동차 엔진 다음으로 중요하다고 했다. 비싼 택배비까지 지불하고 받았는데 항공사에서 도저히 짐으로 실어줄 것 같지 않았다. 설사 실어준다고 한들 한정된 20㎏ 이상 무게에 대한 추가 요금은 어떻게 할 것인가. 머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베이징에 있는 집사의 믿음이 좋은 것인지, 무식한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이를 승낙한 나 자신도 한심해 보였다. 내 짐도 만만치 않아 짐은 100㎏ 정도 오버될 것이 분명했다. 정상대로 하면 50만원의 추가 비용을 물어야 하는데 이는 당시 두 사람의 비행기삯이었다. 또 여기서 통과한들 베이징 공항에서 통과될지도 걱정이었다.

그러나 안절부절 못하는 중에 믿음이 생겼다. 이것도 선교이기에 담대히 기도하며 부딪쳐 보자고 생각했다. 먼저 단기팀을 모이게 한 뒤 손잡고 간절히 기도했다.

내 차례가 되어 짐과 함께 미션이 든 가방을 저울에 올려놓았다. 무려 127㎏이었다. 마음속으로 계속 기도했다. 그런데 직원이 127㎏을 27㎏이라고 적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그 직원이 봐준 것인지 착각한 것인지 지금도 나는 모른다. 중요한 것은 추가 요금 없이 무사히 통과됐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엔 베이징 공항을 통과할 걱정에 기내식도 먹는 둥 마는 둥하며 기도에 매달렸다. 예상대로 검색대에서 걸렸다. “도대체 이게 뭐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중국어를 모른다면서 계속 손을 내저었고 답답해하던 세관 직원은 화가 난 표정으로 그냥 가라고 손짓을 했다.

공항을 빠져나오고 나서야 “하나님, 감사합니다”란 신앙고백이 절로 나왔다. 긴장을 해서인지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미션을 공급받은 승합차는 조선족을 위해 베이징 시내를 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간증이다.

이 무렵 딸은 중국 생활에 잘 적응하며 지냈는데 오히려 아내가 잘 지내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아내가 딸 때문에 거처를 중국으로 옮겼고 내가 마지막으로 합류하게 됐다. 많은 분들이 선교나 전도를 목적으로 본인이 먼저 현지에 가고 가족이 따라오는데 내 경우는 정반대였다.

이때 다니던 칼빈신학대학교와 50년 역사의 중국 화북전력대학교의 자매결연을 주선한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학생 수 2만5000명의 대학이 신학교와 손잡은 것은 큰 사건이었다. 당시 중국에는 한류 바람이 불어 한국어를 배우려는 중국 학생이 많았다.

현지에서 결연식을 가진 뒤 3명의 한국 교수가 이 대학에 들어가 한국어를 가르치게 됐다. 당시 총장님은 지금은 소천한 김의환 박사님이셨는데 이후 내가 중국에 온 뒤에도 격려와 지원을 많이 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자매결연을 계기로 ‘엄청난 사건’을 만드셨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중국선교에만 전념해야 했다. 그것은 자매결연 후 만리장성 구경을 갔다가 내가 갑자기 심장 이상으로 쓰러지고 만 것이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