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비트는 감성… 삶의 순간순간은 영원한 게 아니다

입력 2011-05-08 17:42


황인기 ‘내일이면 어제가 될 오늘’ 전

‘디지털 산수’ 설치작업으로 잘 알려진 황인기(60·성균관대 예술학부 교수) 작가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서울대 공대 응용물리학과를 다니다 그만두고 같은 대학 미대 회화과를 나왔다. 대학졸업 후 그는 10년간의 미국 이민생활을 거쳐 1986년 귀국한 다음 97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 등 굵직한 국내외 전시를 선보였다.

그는 “돈 벌어서 재미나게 잘 살아보려고 공대에 갔는데 1년 다녀보니 그렇지 않을 것 같아 다시 미대를 갔다”고 한다. 재미있게 잘 살아보겠다는 그의 인생 방향은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관람객들에게 대중적인 재미를 선사하는 것으로 확장되고, 미국에서 지내면서 경험한 예술은 해외 유수의 명화를 비틀어 한국식 산수화로 재해석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그의 작업은 충북 옥천 작업실 주변이나 여행 중에 만난 풍경을 채집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채집한 소재들을 컴퓨터를 이용해 픽셀로 바꾼 뒤 못의 일종인 리벳이나 크리스털, 레고 블록 등 오브제를 붙이면 한 폭의 산수화가 된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디지털 산수화를 구현하는 그의 작품은 실험성과 독창성 면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맥을 형성해 간다는 평가다.

그의 대규모 개인전이 서울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서 ‘내일이면 어제가 될 오늘’이라는 타이틀로 29일까지 열린다. 아르코미술관 ‘올해의 대표작가’로 선정된 그의 40여년간 작업활동을 망라하는 작품 80여점을 전시한다. 전시 제목으로 삼은 작품은 석회 표면에 메주콩, 우유, 계란, 바나나 등 부패하기 쉬운 재료들을 발라 영원하지 않은 삶의 순간순간을 표현하고 있다.

1층 전시실에는 북한산에 올라 둘러본 360도 파노라마 설치의 풍경화 ‘한 바퀴 획’(1994) 이후 전통의 현대화 작업에 매달린 작품들을 연대기 순으로 돌아볼 수 있게 배치했다. ‘황새마을’ ‘몽유’ 등 스펙터클한 대작과 함께 ‘오래된 바람’ ‘산보’ 등 더욱 업그레이드된 연작들이 관람객들을 압도한다. 부드러운 필선으로 선문답 같은 문구를 넣은 드로잉도 처음 공개한다. 2층 전시실에는 세잔의 정물화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등 명작들을 재해석한 ‘플라’ 시리즈와 아프리카 어린이의 기아 문제, 이라크 전쟁의 아픈 상처 등을 소재로 한 ‘플라 차일드’ 연작이 전시된다. 또 페라리, 롤렉스, 루이비통 등 상표들이 녹슬고 부식돼 형체만 드러내는 그림을 통해 명품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이미지들의 가치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비꼰다.

그는 “중국 작가들은 서양미술을 맛있는 조미료처럼 갖다 쓰는 데 반해 우리 작가들은 서양미술을 맹목적으로 주인처럼 섬기는 경향이 일부 있다”면서 “한국적 미학을 잇는 것은 재료가 아니라 제작 태도의 문제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다들 모이기만 하면 돈 얘기를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이번 전시를 보고 뭔가 좀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02-760-4850).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