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밀착형 개그, KBS2 개그콘서트 ‘생활의 발견’… 진지한 이별장면 + 누추한 생활 = 웃음폭탄
입력 2011-05-06 17:55
여자가 남자에게 유학을 가게 됐으니 그만 만나자고 말한다. 남자는 당황한다. 하지만 여자의 결심은 단호하다. “미국 가서 학위 따고 박사 과정 밟으려면 5년은 더 걸릴 거야.” 여자는 그렇게 떠나간다. 남자는 여자를 잡지 못한다….
멜로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보이겠지만 이는 지난 1일 KBS 2TV ‘개그콘서트’에서 방송된 ‘생활의 발견’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코미디언들은 배우처럼 진지하게 연기하고 극이 진행될 때는 슬픈 음악이 깔린다. 도저히 웃길 것 같지 않지만 관객들은 웃음을 참지 못한다.
웃음의 발단은 우선 이별 장소가 감자탕집이라는 것에서 기인한다. 남자는 “너 지금 무슨 소리야”라고 화를 내면서도 테이블
위의 김치를 자른다. 우거지를 넣어 달라는 부탁, 육수를 더 달라는 주문을 잊지 않는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붙잡는 남자를 상대로 “내가 꿈꿔왔던 길이야”라고 응수하던 중 점원이 다가와 가스 불을 줄이려고 하자 이렇게 말한다. “놔두세요. 졸여야 맛있어요.”
‘생활의 발견’ 이별 장면은 이처럼 드라마에 나오는 이별 풍경과는 다르다. 하지만 어떤 드라마보다 더 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제목 때문인지, 동명의 영화를 만들기도 한 홍상수(51) 감독의 ‘유머 코드’도 연상된다. 홍 감독이 만든 영화들처럼 ‘인간이 얼마나 찌질한 존재인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달 17일 첫 전파를 탄 이후 ‘생활의 발견’은 매주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최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난 코미디언 송준근(31)과 신보라(24) 김기리(26)는 “공감 가는 상황을 연출하되 억지로 웃기려고 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코너를 만든다”고 말했다.
“김병만 선배가 ‘삼겹살집에서 헤어지는 상황을 콩트로 만들면 재밌지 않겠냐’고 말해준 것이 아이디어가 됐어요. 녹화 전 제작진과 동료들 앞에서 처음 이 코너를 선보였는데 정말 반응이 좋았습니다. 웃기려고 애쓰지 않고 담담하게 일상을 풀어낸 것이 포인트였죠.”(송준근)
“첫 방송 전에 리허설을 하면 할수록 ‘이게 과연 먹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코미디가 아닌 드라마로 받아들이진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죠.”(신보라)
원래 이 코너의 제목은 ‘우리들의 진지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생활밀착형 웃음 코드를 탑재한 코너인 만큼 첫 녹화 이후 ‘생활의 발견’으로 제목을 바꿨다.
‘생활의 발견’ 팀이 소재를 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들은 일단 장소를 정하고, 해당 장소에서 벌어질 법한 에피소드를 엮는 식으로 코너를 만든다고 했다. 감자탕집 등으로 콩트의 배경이 정해지면, 웃음 포인트를 찾기 위해 직접 식당에 가 보기도 한다. 지금까지는 연인 사이의 이별만을 다뤘지만 앞으로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슬픈 상황’을 소재로 삼겠다는 것이 이들의 구상이다.
2007년 KBS 공채 개그맨으로 입사한 송준근은 그동안 ‘느끼남’ 캐릭터로 인기를 얻었다. 반면 신보라와 김기리는 지난해 입사한,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신인 연기자다. 두 사람 입장에서는 지금의 인기가 낯설 수밖에 없다. 신보라는 “학창 시절 개그콘서트에 나온 캐릭터를 흉내 내곤 했는데 이제 나를 누군가가 따라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정말 기분이 좋다”며 웃었다.
김기리는 “(방송 첫 주에 나간) 삼겹살집에서 헤어지는 연인의 모습이 자신이 과거 처했던 상황과 똑같다며 울었다는 시청자도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시청자와 함께 만들어나갈 수 있는 코너이니 아이디어가 있으면 무엇이든 프로그램 게시판에 올려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