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세 번째 시집 ‘저녁의 슬하’… 직접 보고 듣고 느낀 삶의 비애 녹여내
입력 2011-05-06 17:25
가끔 시집 뒤에 붙는 해설이나 발문이 시집을 더 빛내는 경우가 있다. 오래 전 허수경 시인의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2001)에 붙은 소설가 신경숙의 발문이 그랬듯.
1998년 ‘시와반시’ 신인상으로 등단한 후 꾸준히 자신의 음역을 넓혀온 유홍준(49·사진)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저녁의 슬하’(창비)에서 만나는 시인 김언희(58)씨의 발문 ‘직방인(直放人)의 초상’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성(城) 앞 모텔, 이층 복도 끄트머리 콘돔 자판기 앞이었다, 우리가 처음 맞닥뜨린 곳은. 붉은 소화전 앞이었나, 이십년 전의 일이다”로 시작되는 김언희의 발문은 자신보다 9살 연하인 유홍준과의 교유록인 동시에 시인 유홍준의 시 세계를 그의 일상을 통해 간추려내는 빼어난 산문의 힘을 보여준다.
싱싱한 문청이었던 20년 전의 유홍준에게 먼저 다가가 시 공부를 같이 하자고 제안한 쪽은 김언희였다. 김언희에 따르면 유홍준의 별서(別墅)는 경남 산청에 있는 불알친구 이수열의 포크레인 정비소인 ‘혼외정사’다. 택호를 요사스럽게 지었을 뿐, 친구들 끼리 모여 술추렴도 하고 내기 바둑도 두는 컨테이너 아지트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친구가 많은 것은 유홍준의 자장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것인데 김언희는 이걸 “에테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생기, 약동하는 활기”라고 지칭한다.
“사람이란 그렇다/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독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 사람이 사람을 쬘 수 없기 때문/그래서 오랫동안 사람을 쬐지 않으면 그 사람의 손등에 검버섯이 핀다 얼굴에 저승꽃이 핀다/(‘사람을 쬐다’ 일부)
사람 좋아하는 그도 사람에 물리면 혼자 논다. 버섯을 따고 나물을 캐고 물고기를 잡는다. 김언희는 이러한 그의 행태를 두고 “놀다가 죽는 것이 시인의 소임이기는 하지만 시는 언제 쓰나, 와중에 쓴다. 체력과 기력을 탕진할 만큼 탕진하고 소진할 만큼 소진한 다음에, 멍하거나 띵하여 아무런 생각이 없을 때, ‘자귀나무 그늘에 앉아 손톱 밑이나 팔 때, 바늘 끝에 끼우는 지렁이 고소한 냄새나 맡을 때’(‘유월’) 더러는 장판 바닥을 딱 사람 엉덩이 크기로 태워먹은 고향집 구들목에서”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유홍준은 왜 직방인인가. 문단 대소사에 참석했다가도 비위가 거슬리면 골목길에 먹은 걸 다 토해놓거나 오장육부가 뒤틀리면 수상 소감까지 써 보낸 문학상의 수상을 거부하는 대쪽 성깔 때문이다. 김언희의 발문은 또다시 일취월장한다. “이 직방인은 상하좌우로 오로지 직방이다. 1998년 등단해서 지금까지의 문학적 행보나 시적 성취 역시 거침없는 직방이다.-본인이 ‘울 아버지 묏자리 덕’으로 얼버무리거나 말거나 간에. 동시에 골(骨)로 갈 때도 직방으로 간다.”
그만큼 유홍준의 시는 ‘삶’ 자체라는 얘기다. 그는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느끼는 비루한 삶의 비애를 고스란히 시 속에 녹여낸다. “겨드랑이까지 오는 긴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고/애액 대신 비눗물을 묻히고/수의사가/어딘지 음탕하고 쓸쓸해 보이는 수의사가/꼬리 밑 음부 속으로 긴 팔 하나를 전부 밀어넣는다//나는 본다 멍청하고 슬픈 소의 눈망울을/더러운 소똥 무더기와/이글거리는 태양과/꿈쩍도 않고/성기가 된 수의사의 팔 하나를 묵묵히 다 받아내는 소의 눈망울을”(‘인공수정’ 일부)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