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오은영] 연둣빛 어린잎을 위하여
입력 2011-05-05 17:39
비에 씻긴 하늘이 깨끗하다. 황사가 온다 해서 집안에 있던 나는 조금 억울했다. 아파트 뜰로 나갔다. 나뭇가지에 앉아 반짝이는 눈부신 햇살이 반갑다.
일주일 전 창덕궁에 갔을 때도 전날 내린 비로 하늘이 깨끗했다. 떨어진 벚꽃 잎이 길에 흥건했다. 가지 끝에 서성이는 봄바람 탓에 남은 벚꽃이 첫눈처럼 떨어져 날렸다. 꽃이 진 빈자리는 연둣빛 여린 잎이 채웠다. 지금 서있는 아파트 뜰도 제비꽃 같은 여린 잎들이 나무 밑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비우고 채워지는 5월이다.
어린이날이 있는 5월은 계절적으로도 어린이와 어울리는 달이다. 아기 살결처럼 투명한 연둣빛 잎사귀가 그렇고, 너무 여려 살짝만 잘못 다뤄도 상처를 입는 어린 풀이 그렇다. 정말이지 여린 것일수록 상처를 잘 입는다.
나는 대학생 아들과 아직도 간지럼 태우며 장난을 치곤한다. 한번은 장난치다가 잘난 척을 했다. “잔소리 안 하는 엄마를 둬서 좋지?” 흥에 겨워 한 말인데 웬걸, 본전도 못 찾았다. “아니! 잔소리가 적은 편이지만 안 하진 않아.” 아들은 정색하며 중학교 때 이야기를 꺼냈다.
수학 성적만 조금 나빴는데 수학을 못하면 어떡하느냐며 나무랐다는 거다. 어이고! 어제 일 기억하기도 벅찬 내 기억 장치로 몇 년 전에 한, 별것도 아닌 잔소리가 생각날 리가 없다. 나는 기가 막히고 얄미워 속으로 투덜댔다. ‘녀석, 속 좁기는! 그깟 것에 꽁해 있냐?’ 하지만 기억 장치가 쌩쌩 돌아가는 아들이 상처를 입었다는 데야 어쩌랴. “미, 미안해. 그 말이 아팠니?” 사과를 할 수밖에.
이처럼 별것 아닌 말도 상처로 남는데 하물며 체벌은 그 상처가 얼마나 클까? 언젠가 어떤 아이에게서 ‘학주한테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학생주임 선생님을 ‘학주’라고 말하는 아이의 증오어린 표정에서 상처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서울교육청에서 체벌금지를 발표했을 때 나는 그 아이를 떠올리며 손뼉을 쳤다.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다지만 그 말은 함정이다. 예외는 예외를 또 예외를 낳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생님도 인간인데 감정 개입이 안 되리라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상처를 입은 짐승은 사나워진다. 상처를 입은 어린이들도 사나워진다. 마음의 상처가 쌓인 채 어른이 되는 숫자가 많을수록 증오와 복수로 가득 찬 묻지마 범죄가 일어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면 내 아이가 묻지마 범죄의 피해자가 될 확률도 높아진다. 나는 이기적이라 내 아이의 안전이 우선이다. 특히 딸아이가 안전하게 밤길을 다니려면 잠재적 범죄자가 줄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어린이들이 상처받지 않고 자라야 한다. 어리고 여릴수록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필요하다.
꽃이 진 빈자리를 연둣빛 어린잎들이 채우고 있는 5월. 상처를 입지 않는다면 연둣빛 어린잎들은 따스한 햇살 아래서 연초록으로 또 진초록으로 마음껏 두터워질 것이다. 오늘따라 5월의 햇살이 참 고맙다.
오은영 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