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는 부동산이다… 한국 선거판의 숨은 공식 ‘부동산 지역주의’

입력 2011-05-05 18:04


민주노총 대변인과 국회의원 보좌관을 지낸 손낙구(49)씨는 두 권의 책을 썼다. ‘부동산 계급사회’와 ‘대한민국 정치 사회 지도: 수도권편’. 전자는 교육 건강 수명 등 한국사회의 어떤 현상도 부동산을 빼고 설명할 수 없다는 총론이고, 후자에선 서울 인천 경기 1186개 동네의 역대 투표 결과를 분석해 “선거도 결국 부동산이다”라고 주장했다.

무려 1659쪽의 ‘대한민국 정치 사회 지도’는 지난해 2월부터 올 2월까지 1년간 국회도서관에서 국회의원들이 가장 많이 빌려간 책 2위에 올랐다(1위는 선거컨설팅을 다룬 제임스 하딩의 ‘알파독’, 3위는 조엘 컴이 쓴 ‘트위터: 140자로 소통하는 신 인터넷 혁명’).

이 진보진영 이론가의 ‘부동산 선거론’이 옳다고 거든 사람은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는 여론조사 전문가 배남영(42)씨다. 한국갤럽에서 15년간 정치 여론조사를 담당했던 그는 경기도 분당을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이 패한 첫 번째 이유로 ‘집값’을 꼽았다.

“한국사회에서 부동산은 투기 대상으로 인식돼 왔다. 집값 오르는 건 나쁜 거였다. 그래서 집값 떨어질 때 사람들은 대놓고 불만을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중산층 자산구조상 집값 하락은 가계에 가장 큰 위협이다. 드러내지 못했던 부동산 폭락의 불만을 분당 사람들이 투표소에서 터뜨렸다.”

경기도 ‘분당 아줌마’ 이경선 기자가 4·27 재·보궐선거 ‘분당의 반란’ 주인공들을 만났다. 건강보험료 폭탄, 치솟는 물가, 여당의 안이함, 진부한 선거운동 등 그들이 말해준 여러 이유 중에서 눈길이 간 것은 집값 하락과 전셋값 폭등이다.

선거가 끝나자 한나라당은 수많은 반성의 말을 했고, 빠짐없이 등장한 건 ‘민생’을 챙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 중산층 거주지 분당에서 가장 중요한 민생은 뭘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그 답이 부동산일 수도 있겠다는 가정 아래 부동산을 중심으로 ‘분당의 반란’을 재구성했다.

분당을 지역의 동아2차 아파트 15층 전용면적 85㎡는 올 1월 5억1800만원(국토해양부 아파트실거래가)에 팔렸다. 꼭 3년 전, 이명박 정부 출범 직전인 2008년 1월 이 아파트 17층의 같은 면적은 5억9000만원에 거래됐다. 보통 월급쟁이라면 생활비 아껴 3년간 꼬박 저축해야 모았을 돈 7200만원이 사라졌다.

인근 단지 아파트 전셋값은 2년 전 2억원에서 지금 2억5000만원을 훨씬 웃돌고 있다. 분당을엔 고급 주상복합아파트를 가진 자산가만 사는 게 아니다. 전세, 반전세, 월세 등 세입자 가구가 47%나 된다. 이 중 59%는 2년에 한 번씩 이삿짐을 싸고 있다. 괴로울 수밖에 없다.

분당에서 추락하는 아파트 매매가 그래프와 치솟는 전세가 그래프가 이렇게 정확히 ‘X’자를 그린 적은 거의 없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나타난 현상이다. 국민은행이 매월 전국 아파트 시세를 집계해 작성하는 ‘아파트 가격지수’를 보면 이 ‘X’자 확인할 수 있다.

2008년 12월 가격을 100으로 할 때, 분당구의 아파트 매매가 지수는 2008년 1월 111에서 올 3월 98로 떨어졌다. 11억1000만원짜리 아파트가 9억8000만원이 됐다는 뜻이다. 반면 전세가 지수는 106에서 121로 치솟았다.

참여정부 시절 이곳은 집값이 평균 두 배 가까이 올라 샴페인을 터뜨렸지만 이제 달라졌다. 분당을은 20세 이상 인구의 74%가 대졸 이상 학력자다. 한때 로또 잡은 듯했던 아파트가 더는 로또일 수 없다는 사실, 유권자도 잘 안다. 이들에게 남은 건 불안감과 은행 대출이자다.

배남영씨는 지난해 6·2 지방선거부터 ‘X’자 그래프가 투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건국 이래 처음으로 수도권 전역에서 집값 폭락과 전셋값 급등이 동시에 벌어졌다.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은 한나라당이 차지했지만 그건 집값이 크게 떨어지지 않은 강남 3구의 몰표 덕이다. 중랑구를 제외한 나머지 구는 모두 야당 구청장이 선출됐다. 서울보다 집값이 먼저 떨어진 수도권 5대 신도시, 분당 일산 평촌 산본 중동의 자치단체장도 야당이 접수했다.”

그는 6·2 지방선거와 이번 재·보선 모두 캐스팅보트를 쥔 연령층은 40대였으며, 이들이 한나라당에서 이탈한 최대 원인이 집값이라고 주장한다. 중산층엔, 특히 노후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 40대에겐 교육 건강 등 모든 이슈가 집값과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4·27 분당을 보궐선거의 높은 투표율, 49.1%. 궂은 날씨에도 넥타이 부대가 투표장을 찾았다며 많은 사람이 놀랐다. 꼬박 2년간 매일 11시간씩 선거 통계 분석해 책을 썼다는 손낙구씨는 32.8% 수준인 재·보선 평균 투표율보다 월등히 높은 수치를 이렇게 설명했다.

“수도권 적극 투표층은 언제나 집이 있고 경제적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었다. 셋방 사는 무주택자는 투표에 잘 참여하지 않는다. 분당을 투표율이 예상보다, 과거보다 높은 건 야당 성향의 전·월세 유권자가 전보다 많이 투표소에 갔다는 뜻이다.”

그는 나이가 많을수록 한나라당에, 젊을수록 민주당에 투표하는 ‘세대효과’도 부동산으로 설명한다. 분당구에서 세대주가 20대인 가구 중 집주인과 세입자 비율은 13대 84다(나머지 3%는 무상임대주택에 산다). 이게 30대는 37대 61, 40대 59대 40, 50대는 74대 25, 60대는 78대 22로 변한다. 나이 들수록 집 가진 사람이 많고, 그래서 집값 부양 정책에 우호적인 한나라당 지지층이 많다는 것이다.

내년에 벌어질 총선과 대선. 이 부동산 변수가 어떻게 작용할까.

한나라당 쇄신파 모임 ‘민본21’의 권영진 의원은 “뾰족한 수가 없는 게 문제”라고 했다. 그의 지역구인 서울 노원을 역시 부동산 매매가와 전세가 그래프가 ‘X’자를 그리고 있다. 권 의원은 “집값은 수급이 오래 누적돼 나타나는 문제인데, 집값 하락과 전셋값 상승 곡선이 워낙 가팔라서 국민의 고통과 불안을 해소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비상시국이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나라당 출신의 선거컨설턴트는 이번 분당을 선거에서 나타난 세대별, 연령별, 소득별 투표 결과를 토대로 ‘내년 총선 결과 예상 공식’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처럼 한나라당 친이명박계와 친박근혜계가 반목하는 상황, 야권이 단일화하는 상황까지 변수로 포함시켜 시뮬레이션했다.

그는 “한나라당은 경기도에서 한 석도 건질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친박계 표심이 절반만이라도 한나라당에 붙어 있어 준다면, 그나마 포천·연천, 양평·가평, 양주·동두천, 용인수지, 여주·이천, 파주, 광주, 김포는 해볼 만하다. 하지만 그것도 박빙의 싸움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부는 한나라당보다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듯하다. 분당을 선거 결과가 나온 지 나흘 만에 ‘건설경기 연착륙 및 주택공급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기획재정부 국토해양부 금융위원회, 3개 부처 합동으로 부동산 정책을 내놨다.

골자는 서울과 과천, 5대 신도시 분당 일산 평촌 산본 중동 등에 적용해온 ‘3년 보유, 2년 거주’ 양도세 비과세 요건 가운데 ‘2년 거주’ 요건을 폐지하는 것이다. 분당의 반란을 부동산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것은 그 반란을 잠재우려는 당근책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자산과 계층 변동을 연구해온 중앙대 사회학과 신진욱 교수는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도 ‘집’이란 자산이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그동안 우리나라 정치의 지역주의는 ‘출신지역주의’였지만 2007, 2008년 대선과 총선에선 ‘거주지역주의’가 부상했다. 거주지역주의는 자신의 최대 자산인 집, 결국 지금 사는 곳의 부동산 시세가 투표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전통적으로 민주당이 다소 우세했던 서울과 수도권이 대선 때 이명박 후보의 결정적 지지기반이 됐는데, 이는 뉴타운과 재개발 공약의 힘이었다.”

지난 대선과 총선의 수많은 뉴타운과 재개발 공약 중 지금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은 드물다. 서울시는 거의 ‘공약 철회’ 수준으로 뉴타운 사업을 전면 재검토하고 있다. 집 가진 사람은 집값이 적당히 올라서 좋고 집 없는 사람도 불안하지 않은, 지금과 정반대이면서 가장 이상적인 부동산 시세를 내년 총선까지 만들어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신 교수는 말했다.

“지금 집을 사면 앞으로 집값이 오르겠지, 하는 기대심리가 생겨나야 하는데 2008년 이후 어떤 부동산 정책도 그걸 만들어주지 못했다. 거꾸로 사람들은 뉴타운과 재개발 공약에서 배신감을 느꼈다. 이제 개발 공약으로 선거에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정치권의 유일한 탈출구는 부동산 프레임에서 벗어나 더 강력한 이슈를 던지는 것뿐이다.”

글=우성규 기자, 사진=홍해인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