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경북고’와 전라도 ‘전주고’가 만났다… 위험한 음악회?

입력 2011-05-04 17:46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역대하 7:14).

2009년 1월 20일 미국 제44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인용한 성경 구절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해 지역, 계층에 상관없는 대화합을 이룬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동서 그리고 남북이 화합하지 못하고 갈등과 분열에 놓여 있는 우리나라에 제시하는 바가 큰 말씀이다.

영호남, 화합을 위한 자리를 만들다

서기 660년. 지금의 충남 논산, 황산벌. 갑옷을 단단히 갖춰 입은 두 무리의 군사가 서로를 바라보며 으르렁대고 있었다.

“난 신라의 화랑 관창이다. 계백은 퍼뜩 나와 내 칼을 받으라카이!”

“계백이 뉘 집 개 이름이당가. 저 잡것이 혼날라고. (주위를 둘러보며) 아쌀하게 거시기 해불자!”

신라와 백제의 군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얼굴 생김새만 비슷했을 뿐 사투리, 말투, 음식 등 모든 게 다르기만 했던 그들. 말 그대로 상극이었다.

그로부터 1351년이 흐른 지금도 영호남의 서로에 대한 감정은 달라진 게 없다. 그런데 그 악감정을 타파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1일 서울 양재동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경북고-전주고 동서화합음악회’. 영호남 대표 명문고교가 모여 화합의 음악회를 개최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가 여기저기서 구수하게 들렸다. 경북고와 전주고의 자리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양교 동문은 자연스럽게 섞여 앉아 공연을 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한마음으로 공연에 빠져들어서일까. 처음의 어색함은 점차 사그라졌다.

새하얀 한복을 곱게 입은 장사익씨가 무대에 등장했을 땐 공연장이 떠나갈 듯 함성이 쏟아졌다. 장씨는 “더 큰 화합으로 이어지는 시발점이 되기를 희망한다”며 박수를 보냈다.

교가(校歌) 전쟁

공연의 마지막은 양교 교가 제창.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무조건 더 크게 불러.”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였다. 먼저 흘러나온 반주. 경북고 교가였다. 동문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룰지라 삼천리 문화의 전당/무궁할 손 그 이름 경고의 건아.” 감회가 새로운 듯 눈물을 훔치는 중년의 경상도 사나이들도 눈에 띄었다.

전주고 교가가 이어졌다. “솟으리 솟으리 솟아오르리/오 전주고등학교 구원한 신념.” 몸에 반동을 주는 사람, 주먹 쥔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노래하는 사람. 경북고보다 더 크게, 힘차게 노래를 부르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양교 교가 연주가 끝난 뒤 모두가 한마음이 돼 박수를 쳤다, 상대방을 향한 박수, 꽤 오랫동안 지속됐다. 위압감을 주려 했던 황산벌 함성과 다른, 아름다운 환호성이었다.

성경책을 든 채 공연장을 찾은 전주고 출신 이정윤(52)씨는 연방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오늘 설교가 ‘서로 사랑하라’였어요. 그동안 마음을 나누지 못했던 경북고인과 서로 격려하는 자리를 가져 기쁘네요.”

뒷이야기

음악회 이틀 전. 양교 음악회 추진단장을 함께 만나려 했다. 그런데….

“이쪽으로 와부러라 하시오.” “그 짝에서 와야 제.”

인터뷰 장소를 잡기가 이렇게 어려운 적은 처음이었다. 긴장감이 느껴졌다. 차라리 여의도(경북고 재경동문회 사무실)와 종로(전주고 재경동문회 사무실)의 중간 어디서 만나자 할 걸….

몇 번에 걸친 조율 끝에 여의도 경북고 재경동문회 사무실에서 동서화합음악회 추진단장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래도 형님잉게. 내가 쿨허게 양보해부렀지.”

전주고 소종섭(50) 단장의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좁은 공간을 울렸다. “사실 나으 홈그라운드에서 인터뷰를 해야 하는디.” 잠자코 있던 경북고 황재홍(53) 단장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한마디 던졌다. “왜. 어웨이라 불편하당가?”

티격태격 말을 주고받는 모습. 최근 인기를 끌었던 영화 ‘위험한 상견례’가 떠올랐다. ‘현지’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는 순정만화 작가인 전라도 순수 청년 현준(송새벽 분). 펜팔로 만난 경상도 여인 다홍(이시영 분)과 사랑을 키워가고 결혼을 결심한다. 하지만 현준과 다홍의 아버지는 완강히 반대한다. “전라도는 절대 안 된다 아이가.” “눈에 흙이 들어와도 경상도는 안 돼.” 시종일관 전라도와 경상도의 아버지는 날선 신경전을 벌인다. 딱 황, 소 단장의 모습과 같았다. 하지만 전혀 밉지 않다.

Round 1. 음악회 명칭 정하기

영남과 호남의 명문 두 학교가 처음으로 손을 잡고 음악회를 개최하기로 했지만 여정은 쉽지 않았다. 1년여에 걸친 지난한 준비과정. 줄다리기의 연속이었다. 명칭을 결정하기까지도 꽤 오래 걸렸다.

“경북고가 1916년 개교했으니까 전주고보다 3년이나 빨라. 가나다순으로 해도 우리가 앞이잖아요. 우리 이름이 먼저 나가야지.”(황)

“그동안 좋은 거 다 그쪽에서 했으니까 이건 우리가 앞에 갑시다.”(소)

양측 모두 양보하지 않았다.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논의를 거듭하면서 생각의 간극을 좁혀 나갔다. 행사의 취지와 의미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결국 전주고가 양보해 경북고 이름이 앞에 배치됐다.

Round 2. 클래식 vs 대중음악

“영남 사람들은 클래식을 잘 몰라요. 음악회에 즐겨 가지도 않고요. 우리는 또 명성, 체면을 중시하니까 유명한 가수 불러서 대중음악 공연을 하면 좋겠다고 했죠.”(황)

전주고는 달랐다. 클래식 위주로 공연을 꾸리려 했던 것. 이미 세 차례에 걸쳐 전주고 동문 클래식 음악회를 개최한 바 있는 소 단장은 난감했다.

“우리 동문들은 클래식 공연을 상당히 좋아했거든요. 한 번 두 번 듣다 보면 그 매력에 빠지게 되더라고요. 경북고도 좀 우아하게 클래식도 듣지 말이야.” 소 단장이 웃으며 말했다.

전주고는 처음엔 클래식 공연을 하자는 주장을 일관되게 이어나갔지만 음악회를 처음으로 개최하는 경북고의 입장을 존중하기로 했다. 경북고 역시 대중음악에 대한 고집을 내려놓았다. 1부 클래식, 2부 대중음악으로 공연이 이뤄진 건 양측이 한 발짝씩 물러난 결과였다.

자식이 결혼을 한다면

“두 분은 자식이 상대 지역 출신과 결혼한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전라도 사람의 특성을 인터뷰 내내 보여준 소 단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영화가 내 얘기구먼. 저도 경북 안동 출신 아내와 살고 있어요. 많은 반대를 무릅썼지. 근데 살아보니 지역, 그거 별 문제없더라고.”

무뚝뚝한 경상도 아저씨도 입을 열었다. “사랑해서 결혼한다면 어쩔 수는 없죠. 그래도 ‘가능하면 그쪽을 배제하고 데려 와라’며 금지사항에는 넣지. 하지만 예전보다 배타의식이 줄었어요.”

두 사람은 이번 음악회로 금세 인식 변화가 생길 거라 기대하진 않으면서도 소통의 첫 단추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다음엔 성가대 경험이 있으신 분들 위주로 양교 합창단도 꾸리려 합니다. 시도를 계속하다 보면 해묵은 지역감정도 언젠간 없어지겠지요.”

글 조국현 기자·사진 이동희 기자 joj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