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하동 상이리 아이들 22명의 ‘어린이날 소원’… “엄마·아빠, 우리집에 자주 와주세요”

입력 2011-05-04 17:53


“저는 장차 5월의 하늘처럼 푸른 꿈을 키울 수 있는, 미국 디즈니랜드보다도 더 크고 좋은 어린이왕국을 만들 거예요.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나의 희망과 꿈이 꼭 이뤄지도록 조용히 기도하겠어요.”

1978년 5월 4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당시 서울 서교국민학교 6학년 금향 어린이의 글.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의 꿈은 크고도 푸르다. 어김없이 다시 찾아온 우리 어린이의 날. 오늘의 주인공들은 어떤 소원을 갖고 있을까.

지리산 자락의 경남 하동군 청암면 상이리 푸른빛지역아동센터(대표 손용우 청암제일교회 목사). 이곳에서 뛰놀며 공부하는 어린이 22명에게 어린이날을 맞아 바라는 점, 갖고 싶은 것을 물었다. 시골 어린이의 적잖은 수가 그러하듯 이곳 22명도 조손가정 편부·편모가정이 많다. 하지만 그들의 꿈만은 지리산 천왕봉보다도 높다. 2일 알록달록한 포스트잇에 비뚤배뚤 적어 내려간 동심, 그 속을 들여다봤다.

산촌. 오후 5시만 되면 어둠이 깔리는, 짐승의 울음소리에 잠을 깨는 그런 곳. 지리산 청학동이 10분 거리라 했다. 산 중턱에 이름대로 푸른빛을 발하고 있는 아동센터가 평안해 보였다. 아이들이 부러웠다. 그 아름다운 지리산의 자연을 병풍 삼아 뛰어 놀고 공부하니까. 얼마나 좋을까.

학원, 전혀 없다. 산골마을이라 집과 집 사이 거리가 멀어 이 센터가 아니었다면 친구도 만날 수 없다. 손용우(52) 목사와 조유순(52) 사모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면서 아이들이 공부도 하고 놀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려 이 센터를 만들었다. 폐교를 활용했다.

아이들, 형편은 좋지 않다. 아빠 엄마는 취나물, 두릅 등을 캐 내다 판다. 그게 주업이다. 당연히 살림이 빠듯하다. 그런데도 아이들의 표정은 항상 밝다. 양병국(45) 교사의 눈에 너무나 예쁘고 선한 천사들이다.

“저도 외지에 있다 들어와서 생활하고 있지만 여기서 아이를 키울 수 있다는 건 축복이에요. 교육 환경은 열악해도 인성적으로 훌륭히 자라나고 있죠. 아픔을 조금씩은 가지고 있지만 밝고 명랑한 아이들이랍니다.”

포스트잇에 소원을 적으라고 하자 아이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한 아이는 “이렇게 쓰면 정말 이뤄질 것 같아요”라며 까르르 웃었다. 한 친구는 농구선수가 되고 싶다고, 다른 친구는 제빵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꿈도 다양했다. 고사리 손으로 정성스럽게 적은 아이들의 마음을 하나하나 읽으며 입가에는 미소가, 눈가에는 이슬이 맺히기도 했다.

눈에 띄는 메모지.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엄마 봭 영민이가.” 간단했다. 쿨한 ‘차시남’(차가운 시골 남자) 같았다. 영민이는 평소에도 엄마에 대한 정이 남달랐다. 센터에서 맛있는 걸 먹을 때도 몰래 싸 엄마를 가져다주곤 했단다. ‘엄마 사랑해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라고 양 교사는 귀띔했다. 자기 마음을 표현해보라고 했을 때 영민이 마음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 역시나 엄마였다.

포스트잇에 또박또박 큰 글씨를 적어나간 진주(11). ‘엄마 아빠, 우리 집에 자주 와주세요.’ 진주 아버지는 외지로 돈을 벌러 다닌다. 주로 멀리 다니시기 때문에 집에 있을 때가 별로 없다. 어머니는 지역 내 나이 드신 분을 돕는 요양보호사를 하시느라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진주의 어린이날 소원은 엄마 아빠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 평소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진주는 이날 선생님에게 “메모지 한 장 더 주세요”하고는 엄마 아빠와 함께 있고 싶다는 내용의 멋진 시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4학년 시은(11)이는 엄마 아빠에게 어린이날 선물을 요구했다. 강한 어조다. “아빠 엄마 술 좀 마시지 마세요. 아빠 담배 피지 마세요. 일만 하지 마시고 저랑 좀 놀아주세요.” 평소에도 시은이는 똑부러진 아이란다. 나중에 판사를 하면 참 잘할 것 같다는 게 손 목사의 말이다. 시은이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엄마 아빠를 자주 보지 못해 가뜩이나 속상한데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시는 아빠의 모습을 보는 게 싫었나보다. 분홍색 포스트잇에 적어 내려가면 꿈이 이뤄질 것 같았을까. 가장 정성스럽게 소원을 적은 아이가 바로 시은이였다.

22명 아이들의 소원이 적힌 포스트잇을 손에 쥐었다. 왠지 모를 따뜻함이 전해졌다. 참 밝고 예쁜 아이들의 날, 모든 소원이 이뤄지게 해달라고 살짝 눈을 감고 기도를 드렸다 .

푸른빛지역아동센터

청암제일교회 손용우 목사와 조유순 사모가 경남 하동군 청암면 상이리 폐교된 초등학교에 개설한 아동센터. 아이들이 예수님의 성품대로 자라날 수 있도록 인성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영어 수학 등 교과 교육과 독서 교육도 하고 있다. 매 주말 운동회를 열어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등 전인적 교육을 하고 있다(055-882-7230).

글 조국현 기자·사진 홍해인 기자 joj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