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회고록] 경남 통영시 미수동 임숙례 권사
입력 2011-05-04 17:50
“술·빚 30년 떠 안고 모질게 살았지… 기다리니 복이 오네”
경남 통영시 미수동에서 나고 자란 임숙례(61) 권사는 억척스런 우리의 어머니 자화상 그 자체다. 술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임 권사는 절대 술을 먹지 않는 신앙 좋은 사람과 결혼하길 원했다. 그런 남편을 만나 어머니와 다른 삶을 살 줄 알았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배를 타는 남편은 뒤늦게 술과 담배 등을 배워 속을 썩였다. 여러 번 삶을 포기하고 싶었으나 손가락질 받을 자녀 생각에 허리끈을 졸라맸다. 30여년을 굴껍질 까는 공장에서 일하며 지긋지긋한 빚을 다 갚고 이제는 편안해졌지만 아직도 공장에 나가고 있다. 남편이 술을 끊고 신앙 좋은 며느리도 본 임 권사는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란 말씀대로 인내하며 살아온 지난날을 웃으며 돌아볼 수 있게 됐다.
장한 나의 어머니
아버지가 술을 많이 드셨어요. 배를 탔는데 돈을 벌어서 술로 다…. 엄마 혼자 농사를 지으니까 먹는 거는 문제가 없는기라요. 보리 심고 고구마 심고, 논에는 나락 심고 그러면 쌀이 나오고. 우리 식구 밥은 먹어요. 근데 돈은 있어야 살 낀데. 돈은 바다에 나가서 해초를 뜯거든요. 조개도 파고, 굴도 따고. 새벽에 시장에 팔아다가 돈이 생기거든요. 그러면 아아이들 학교 갈 때 학용품도 사라고 하고 생활해 나갔는데.
내가 장녀가 되논께 밑으로 남동생이 너이가 있어요. 그 아들도 내가 업어서 키워야 되는기라요. 바로 밑에는 몬 업어도 셋째 동생은 매일 내 등짝에 붙어서 업고 다닝게라요. 바깥에서 공놀이도 하고 고무줄놀이도 하려면 아를 내려놓고 해야 하는디요. 내려놓으면 기어 다니다 흙도 먹고 벌레도 먹고 했거든요. 그때는 다른 집 아들도 다 그렇게 컸어요.
남동생은 중학 나온 것도 있고 대학 나온 것도 있어요. 우리 엄마가 열심히 노력해서 시켰다 아닙니까. 나는 밑에 동생들이 많아 공부를 할 수 없어 국민학교만 나왔어요. 국민학교 2학년 때 큰어머니가 객지 가면 편할 거라며 부산 영도에 가라케서 갔어요. 부산서 4년 살았지요. 1960년 부산 살 때 집을 사가…. 여기 논하고 포라서팔아서 3가구 사는 집을 샀어요. 방세로 돈 500원을 받았드랬어요. 국민학교 수업료가 50원인데. 방 2개를 세 놔서 1000원 받으면 쌀을 몇 말 샀지요. 그럼 우리 식구들이 좀 먹는기라요. 영도 사는 동안에는 제사영도교회에 나갔어요. 다시 여기 와서 지금까지 미수교회 다니고 있고요.
나는 할아버지 덕에 편하게 산 거 같아요. 부자로는 못 살아도 우리 식구는 충분히 먹고 살으니까. 아버지 같았으면 우리도 밥을 굶었을 낀데 할아버지가 해 논 게 있어서 논밭 팔아서 집을 샀거든요. 우리 아버지는 술만 자셨어요. 엄마가 바다에 나가서 해초 뜯고 굴 조개 파서 아이 다섯 키운기라요. 남자가 돈 하나 안 갖다 주는데 여자가 노동을 해서 만들었다는 건 엄청난 노력이 들어갔다는 거거든요. 나가서 돈도 벌어야 하고 농사지어야 식구들 밥을 먹을 거 아닌가배. 두 가지 일을 할라니까 힘들었을거라요. 정말 우리 엄마 장하지요. 나도 힘들게 살았지만 난 몬해요.
아홉 번 굿한 후 교회로
큰동생이 아파서 굿을 아홉 번 했대요. 그런데 굿을 또 하라캐서 교회에 나갔다네요. 세 살 어린 큰동생이 일곱 살 먹는데 뇌 안에 몽우리가 볼똑하니 생기드만 올라오면 아가 죽는다고 했대요. 그래서 엄마가 회충약을 사다 먹이고 해도 낫도 안 하고 또 병원에 데꼬 가면 괜히 주사나 한 대 주고 아가 무슨 병인지 말을 안 하는기라요. 그래서 돈만 없어지고 굿하고. 아버지는 술 먹고 도움도 안 되고. 굿을 하고 약을 지어갖고 오는데, 그때는 차도 없어 걸어오는데 아가 움직거리면 아파 앉아있었대요. 지나가던 어느 아지매가 보더니 굿을 해야겠다고 그랬다는거라요. 엄마가 성이 나서, 그날이 토요일인데 아를 내려놓고 약을 앉히고 집 근처 쪼매난 오두막집 교회에 갔대요. 동네사람이 청소하고 있어 우리 집에 예배 좀 드리게 오이소 했다는기라요. 그러고 일요일에 다함께 교회 나갔대요. 엄마는 굿도 할 만치 했으니께는 이제 죽어도 예수 믿고 살란다고 맹세했대요. 그러고 나서 눈만 감으면 마귀들이 지게를 갖고 와 동생을 끌어내려 했대요. 20일 동안 계속 같은 꿈을 꿨다는데…. 그래도 절대로 굿이라고 안 하니 이제 더 이상 꿈에 안비때요안보였대요. 엄마가 마귀한테 이긴기라요. 그때부터 다니던 교회가 미수교회인거라요.
꿈꾸던 결혼생활은 깨져버리고
세월이 흐르다보니 내가 뭘 생각했냐면 ‘나는 술 먹는 사람한테 시집 안 갈끼다’ 이레 생각하고 살았는데 우리 동네 교회 나오는 집사님 아들이 참 야문기라요. 나보다 여섯 살이 더 묵는데 그 당시 내가 볼 때는 그 사람이 검소하고 성실하고 키는 좀 작아도. 가난해도 마음이 착한 것 같았어요. 교회도 아버님은 잘 못 나와도 어머님은 잘 나오고 외갓집도 모태신앙이거든요. 착하고 야무다고 어른들이 그랬싸서…. 한동네에 살아도 거리가 멀어 몰랐는데 교회 나와서 엄마 소리 듣고 그 사람을 봤는기라요. 그 사람도 날 보고. 그래 어쩌다 본께 서로 눈이 맞았던 모양이에요. 그래 결혼하게 됐지요. 근데 연애 걸었다고 말이 안 좋아서 교회에서 못하고 식장 가서 결혼했어요. 그때는 그게 허물이었다꼬.
시집 가서보니 우리 시아버지가 참 술을 많이 잡쉈는기라요. 우리 아저씨는 그 당시 술을 안 먹었고. 근데 장어 싣고 다니는 일본 배를 타게 됐어요. 일본의 화관도 가고 대판도 가는데 일본 돈을 가지고 다녔지요. 당시에는 밀수를 해갖고 뱃사람들이 돈을 벌었어요. 그때 일산은 제품이 참 좋아갖고 한국산 물품은 고장이 잘 났는데 일산은 고장이 안 났어요. 배로 다니니께 돈을 벌어갖고 나각결혼갈 땐 조그만 오두막 방 한 개 있는 데로 갔거든요. 신랑 집이. 동생이 둘이 있고 식구가 다섯이 되는데, 말하자면 우리보다 못한 집에 간기라요. 사람 하나 보고 갔어요. 술 안 먹고 담배 안 피워 갔는데 배를 타고 다니다 보니께 술도 먹고 담배도 피우데요. 술을 엉망으로 많이 먹는기라요. 시아버지 술 먹지 아저씨 술 먹지 교대로 술에 취해 잔소리를 해싸서. 그러다가 밀수 사건이 나서 놀게 됐는데 집을 너른 걸 사놔 돼지 마구리축사를 지었어요. 가축사업을 하다 빚을 엉망으로 졌지요. 집하고 땅을 다 팔아먹었어요. 많은 빚을 안고 넘의 셋방으로 나가게 됐어요. 어르신 두 분은 따로 방을 얻어드리고. 우리는 아들딸과 나가서 사는데 돈 받을 사람이 열도 넘어가지고 오늘은 이 사람이 오고 내일은 저 사람이 오고…. 오는 사람마다 만원이고 2만원이고 줄 수가 없는기라요. 그래서 제일 적은 사람부터 줬어요. 그러니까 명수가 줄어들데요. 생활하기가 좀 빠듯했지요. 그래서 공장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굴 껍질 까는 공장에 나가다
굴 껍질 까는 공장 나간 지 30년이 넘었어요. 그때부터 내가 여태까지 다니는데. 매일 새벽기도 갔다 6시20분에 출근해요. 나맛대로내맘대로 가요. 그래도 거기 가면 제일 늦어요. 다른 사람들은 새벽 3시에 가거든요. 많이 하면 많이 벌고 적게 하면 적게 벌기 때문에. ↗
오후 5시에 마치는데 주 5∼6일 가요. 1년에 8개월 나가요. 6∼9월 4개월은 놀고. 5월 달 넘어서면 굴이 맛이 없거든요. 추석 지나고 나면 다시 해요.
(손을 만져보았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배겼다.) 처음에는 많이 다쳤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길게 한숨) 내가 죽을라꼬도 몇 번 했는데 빚 때문에 몬 죽겠는기라요. 내가 빚을 남기고 죽으면 우리 부모 형제 한동네 안에서 욕을 많이 듣기것고, 우리 아들 둘은 어리니까 월매나 욕을 듣겠노. 저거 엄마가 우리 돈 떼먹고 죽었다이랄까 싶어서. 나 하나만 죽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요. 내가 이 빚을 해결해 놓고 죽어야 되지 싶어서. 그 빚만 갚을라고 내가 얼마나 공장 다니며 노력했는데. 그래 가지고 아들 공부시키고 15년을 넘의 집에 나가 셋방살이하며 빚을 청산했는기라요.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믿는 집 가서 신앙생활 잘하겠다, 신앙 있는 집에 온다꼬 왔는데 살다보니께 풍파가 많이 생기는기라요. 내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많이 오고. 그래도 내가 30년 동안 그 풍파 속을 겪고 살았어요. 술, 빚을 30년을 떠안고 살았는데 이제 다 해결했어요.
빚을 청산하고 난 뒤 청약적금을 한 달에 10만원씩 주택은행에 였어요넣었어요. 주택은행에서 오라고 해서 가니 요 밑에 미수동에 주공아파트를 짓는데 하끼냐할거냐 카는기라요. 그래서 하겠다고 했지요. 중간층이 당첨됐는데 돈이 없어 형제한테 3000만원을 빌려 내 갖고 들어갔어요. 들어가서 다 갚았어요. 그러다 나이 들면 내가 뭔 돈으로 관리비 내겠노 싶어 지난해 팔고 주택으로 이사 왔어요. 자녀만 믿고 있다가는 낭중에 자녀까지 나쁜 사람되겠는기라요.
지금은 아저씨가 배를 계속 타기 때문에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어요. 아저씨가 젊었을 땐 술을 먹고 다니는데. 술 먹는 사람은 돈이 많이 헤퍼요. 돈이 제대로 집에 안 들어와요. 내가 벌어야 생활이 되는기라요. 빚도 해결지고, 여태까지 해요. 나 하는 일이 고마 익숙해 있으니까 살살 댕기지요. 우리 시어머니가 기도할 때 “우리 아들 술 먹을 때 꾸린내 나게 해주세요” 했는데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난 다음해 아파서 술을 자동으로 끊데요. 위궤양이 만성이 되 갖고 위가 많이 헐어가 피가 나서 끊었어요. 의사가 술 한 번 먹고 도지면 죽는다카니까 안 먹지요. 아이고 하나님 돈에 쫓겨 힘들어서 넘한테 욕도 많이 들었고 술도깨비하고 사느라 고통 받고. 하나님 나 좀 빨리 데려가라고 기도했는데 이제는 다 해결된기라요. 참는 자가 복이 있다니께요. 기다리는 자가 복이 있다고. 고마 성경말씀이. 기다리다보니 하나님께서 모든 걸 다 해결해주는기라요. 술 먹는 사람이 술을 끊은 게 말도 없고 다툴 일이 없어요. 마음이 편해요.
아들은 어릴 때는 교회에 잘 나갔어요. 외지에 나가 공부하면서 교회를 잘 안 댕기더니 신앙이 좋은 서울 아가씨를 만나 지금은 함께 교회에 나가요. 며느리는 오빠가 성남서 개척교회를 하는 목사님이라고 하대요.
사해 순례, 둥둥 뜨는 기라요
결혼한 지 40년 됐는데 30년은 힘들게 살고 10년은 편하게 살았어요. 내가 벌어서 지난 1월 달에 성지순례도 갔다니께요. 가족 간에 여행은 한 번도 못 가봤어요.
생전에 비행기 처음 타봤어요. 여기는 한겨울이 돼서 수도가 다 얼었다카는데 거기는 보리도 시퍼렇고 여기 늦은 가을 정도의 기온인기라요. 이집트, 요르단, 이스라엘을 교회에서 22명이 12일 동안 갔다왔어요. 사해, 시내산, 갈릴리 호수, 예루살렘 성전, 피라미드, 스핑크스, 동굴교회, 페트라를 봤어요.
제일 기억에 남는 거는 사해바다. 그걸 가스로가서 모욕탕 가드끼같이 물에 담았드니담갔더니 피부색깔이 하얗게 돼요. 우짜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힘줄이 전부 거미줄처럼 뚜렷하고 선명하게 보이는 기라요. 거기서 내가 실험을 해봤지요. 내 몸이 진짜 뜰까. 이 사해 바다에. 한번 누워보니 그냥 둥둥 뜨는기라요. 일반 바닷물보다 다섯 배 짜다카는데. 내가 입에 넣어보진 않았지만 그 정도로 짭대요. 내가 누워서 뜨니까 다른 사람도 따라 눕대요. 다 누보니 다 뜨는 기라요. 참 신기한 경험을 했지요.
다니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대체 뭘 먹고 살았을까 궁금했어요. 우리가 볼 때는 기온도 맞지 않는데 여름에는 50도까지 올라간다는데 어떻게 생활했을꼬. 산을 보니까 돌만 있고 흙이라고 없고 식물이 자랄 수 없겠는기라요. 시내산에 올라갔는데 모세가 여기서 40일 금식기도 했다는데 내가 생각할 때는 이해가 안 되는기라요. 거기는 풀도 없고 물도 없던데. 모세가 거기서 어떻게 십계명을 받았는지. 거기 시내산에 가서 보고 마음에 감동을 받았어요. 믿음생활 했다는 것이 전에는 성경을 읽고 했지만 바로 믿지 못한 것도 있었거든요. 그러나 막상 가서 보니까 진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 먹였다는 거. 내가 보지는 못했지만 그 말씀을 내 마음 속에 더 깊이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근데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었을 거 같아요. 나 혼자 살라카면 못살 거 같아요. 거기 가서 우리나라는 진짜 복 받은 땅인 줄 알게 됐어요.
여행 다니며 10일 동안 함께 한 식당에서 밥 먹고 생활하니 좋던데요. 교회 생활해도 그렇게 많은 시간 같이 모여 있던 시간이 별로 없거든요. 예배 마치면 집을 가서 볼 일 보고. 거기서는 넘의 나라니까 흩어지면 안 되니까. 같이 여행간 사람들과는 지금도 친해요. 막상 경비는 들었지만 이제는 목사님 설교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됐어요.
말씀대로 사는 게 제일 행복
많은 것도 안 바랍니다. 몸만 다 건강하고. 딸을 믿는 집에 보내고 싶고. 또 하나님 아버지 우리 집에 믿음의 자녀만 주이소. 신앙생활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신앙자 보내달라고 기도해요. 하나님 기뻐할 수 있는 사람 보내달라꼬. 나는 그것밖에 안 바랍니다. 재물도 안 바랍니다. 똑똑도 몬하재. 나이 들어서 기술도 없는 게 뭘 해서 돈을 많이 벌겠는가. 한 달 벌어 한 달 쓰고 그래 해도 몸만 건강하고 정신만 바로 가지면 되는기라요. 앞을 향하여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우리 가족이 되는 게 제일 행복한기라요.
■ 미수교회는
1907년 1월 25일 호주 손안로 선교사가 남선교회 순회헌신예배 때 통영교회(현 충무교회)에 출석한 하강진씨가 자택에 표식을 세워 교회를 설립했다. 무속신앙이 강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복음화율이 낮은 곳이지만 역사가 100년이 넘는 교회이다. 2007년 7월에는 전웅구 목사가 부임해 담임목사로 헌신하고 있다. ‘꿈대로 되는 교회’를 표어로 영감 있는 예배와 열정적인 기도, 성령의 능력으로 2020 세계비전을 이루는 사랑의 공동체란 비전을 키워 가고 있다. 또 파키스탄 중국 탄자니아 파푸아뉴기니 등에 선교사를 파송해 세계선교에도 열심이다. 제적·출석 성도 수는 500여명이다(055-644-8640).
통영=정리 최영경 기자·사진 구성찬 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