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돕기 바자 여는 설윤형·이주영 모녀… 디자인은 ‘따로’ 나눔은 ‘같이’

입력 2011-05-04 18:00


1950년대 전남 순천, 국민학생(지금 초등학생) 명자의 부모는 농사꾼이었다. 가난했다. 명자는 매일 같은 시각 어느 집 대문이 보이는 길모퉁이에 숨었다. 동네 바느질을 도맡는 집이었다. 그 집에서 쓰레기 버리는 시간을 명자는 알았다. 옷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가 갖고 싶었다. 마침내 버려지면 고사리손에 넘치도록 쥐고 집으로 뛰었다. 뒤에서 “이놈” 하는 호통이 당장 귓전을 칠 것 같았다.

명자는 구겨진 천 조각을 주물러 빨고 책갈피에 넣어 말렸다. 물기가 빠져 표면이 반반해지면 제 팔뚝만한 놋쇠 가위를 들었다. 별 모양을 내고 인형 옷을 만들어 입히면서 날 밝는 줄 몰랐다.

설명자. 국내 초창기 의상 디자인계를 이끈 설윤형(67)의 본명이다. 우아하고 섬세한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파격 디자인으로 독립 영역을 구축한 딸 이주영(40)과 모녀 디자이너 계보를 잇고 있다. 두 사람이 오는 12일 동료 디자이너들과 이웃돕기 바자회를 연다. 지난달 28일 서울 청담동에서 만났다.

브랜드 설윤형

설윤형은 62년 상경했다. 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서울 광장동 보육원에서 숙식하며 일했다. 종로의 국제복장학원(지금 국제패션디자인학원)을 다녔다. 의상 디자이너 고(故) 최경자씨가 61년 세운 학원이었다. 지난해 8월 숨진 앙드레 김(김복남) 등 정상급 디자이너 대부분이 이곳 출신이다.

설윤형은 틈만 나면 시장에서 살았다. 옷을 보는 것만으로 즐거웠다. 자다가도 “옷” 하면 벌떡 일어났다. 옷감을 찾으려고 남대문 동대문시장에서 미국 구호물자를 뒤졌다. 재봉틀을 잡으면 밤을 샜다. 직접 만든 옷을 입고 명동을 거닐었다. “어디서 샀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다. 자신감이 붙었다.

75년 명동에 양장점을 냈다. 예명 ‘윤형’은 이때부터 썼다. 윤택하고 형통하리라는 뜻이다. “성경을 인용했어요.” 설윤형이 설명했다. 그는 유년 시절 이방인인 미국인 선교사를 구경하다 교회에 첫발을 들였다.

설윤형은 88년 매장을 청담동으로 옮겼다. 지하 1층을 교회로 내놨다. 동료 디자이너들이 비용을 댔다. 90년 11월 아름다운교회가 문을 열었다. 모델, 사진작가, 의상학과 교수 등 50여명이 모였다.

의상 전문가가 많은 교회인데 옷차림에 신경 쓸 일은 없다고 한다. “다들 우리 교회 오면 장례식장 같다고 해요. 사람들 옷이 다 새까매서.” 설윤형이 이날 입은 옷도 검정이었다. 검정을 즐겨 입는다는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노동복으로 최고예요. 때가 안 타니까 일에 전념할 수 있잖아요.”

설윤형의 남편은 무교동 음악다방 ‘세시봉’ 사장이던 이선권(74)씨다. 60년대 이씨는 아버지가 소유한 세시봉을 운영했다. 올해 초 재조명을 받은 김세환 송창식 윤형주 조영남 등 ‘세시봉 친구들’은 당시 이씨가 숙식을 제공하며 발굴한 가수였다. 설윤형이 이씨를 처음 만난 곳도 세시봉이었다.

“스무 살 갓 넘었을 때 친구 만나러 세시봉에 처음 갔어요. 교회 수련회 음식에 쓰려고 시장에서 재료를 많이 사서 돌아가던 길이었죠. 남편은 그런 제 모습이 딴 세상 사람이었대요. 장바구니 들고 나타나선 교회 수련회 간다고 했으니. 교회 안 다니던 이선권씨한텐 신선한 충격이었나 봐요.”

두 사람은 세시봉에서 가끔 만났다. 이씨가 청혼했다. “교회 안 다니면 결혼 못 한다니까 남편이 63년부터 저랑 영락교회에 나갔어요.” 66년 12월 두 사람은 결혼했다. 이씨는 지금 아름다운교회 장로다.

설윤형은 85년 동료 디자이너들과 시골 봉사를 구상했다. 의료, 미용 등 각 분야 전문가가 동참했다. 이듬해 찾은 전남 완도군 노화도는 황량했다. 해남군 땅끝마을 최남단에서 남쪽 뱃길로 10여㎞ 떨어진 섬이었다. 지역 교회는 논 한복판에 있었다. 목사 부인이 밤마다 논바닥에 버려진 채소를 줍고 미꾸라지를 잡아 끼니를 때운다는 소문이 있었다. 3년간 도왔다. 교인이 늘고 교회는 자립했다.

브랜드 이주영

의상 디자이너 이주영은 설윤형의 장녀다. 둘째 딸 주이(37)씨는 금속 공예가다. 가운데 돌림자는 ‘주(主)님’에서 땄다. “제가 ‘주님, 주님’ 많이 하니까 돌림자로 ‘주’자밖에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설윤형은 맏딸이 음악을 전공하길 바랐었다. 이주영은 10년간 첼로를 켰다. 84년 예술 중학교인 예원학교에 입학해 94년 미국 커티스음악원에서 대학 과정까지 마쳤다. 이후 뉴욕의 파슨스디자인 학교에 들어간 것은 설윤형 생각과 멀었다. 설윤형은 한동안 클래식 음악을 듣지 않았다. “혼자 기도만 했어요. 속상하지만 본인이 행복한 걸 하는 게 맞죠. 그게 달란트(천부적 재능)일 테니까요.”

이주영은 자연스럽게 의상 디자인에 끌렸다고 했다. “특별한 계기가 없어요. 어릴 때 만날 본 게 그거(의상 디자인)잖아요. 엄마 회사 가서 옷 보고 만지고 모델 언니들이랑 노는 게 생활이었어요.”

이주영은 96년 귀국했다. 설윤형 부티크에서 일하다 2004년 독립했다. 같은 건물 2층에 ‘부활’이라는 뜻의 부티크 ‘레쥬렉션(resurrection)’을 차렸다. 이주영은 설윤형과 달리 남성복 위주로 만든다.

“매장을 낼 때까지 스타일리스트(의상 연출자)를 많이 했는데 남자 옷은 아무리 찾아도 입힐 게 없더라고요. 다양하지도 않고. 제가 좋아하는 옷을 입혀 보자는 생각으로 남성복에 집중했어요.”

강인한 남성상을 추구하는 이주영의 디자인은 과감하다. 기괴하기로 정평 난 미국 가수 마릴린 맨슨이 이주영 단골이다. 마룬 파이브, 레이디 가가, 블랙아이드피스 등도 그의 옷을 입었다.

2005년 2월 마릴린 맨슨이 방한했을 때 이주영은 그가 묵는 서울 삼성동 인터컨넬탈호텔에 갔다. “마릴린 맨슨에게 전해 달라”며 안내원에게 옷을 맡겼다. 마릴린 맨슨의 매니저가 이주영에게 전화했다.

“꿈인가 생시인가 했어요. 그날 마릴린 맨슨 방에서 많이 이야기했어요. 제 옷을 입어보면서 정말 좋아했어요. 자기 여자친구도 소개해주고. 만나 보니까 그냥 너무너무 웃긴 아저씨더라고요.”

이주영은 두 아들의 엄마다. 내년 초등학생이 되는 첫째 하울(6)군의 이름은 ‘하나님의 울타리’라는 뜻이다. 남편은 록그룹 ‘시나위’ 출신 가수 김바다(37)씨다. 김씨는 99년 ‘설윤형 쇼’ 음악을 맡은 시나위에서 노래를 불렀다. 당시 베이스기타 연주자가 이주영에게 김씨를 소개했다. 2002년 결혼했다.

이주영은 최근 서태지와 재산 분할 소송을 벌였던 연기자 이지아와 친하다는 점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인터넷에서는 남편이 시나위 출신이라는 사실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처럼 회자됐다. “너무하죠. (남편이 시나위 출신인 건) 전혀 상관없는데 추측이 난무하니까. 두 사람은 만난 적도 없어요.”

모녀, 브랜드 팔아 이웃을 돕다

이들 모녀가 다른 디자이너들과 함께 86년부터 바자회를 시작했다. 설윤형이 동료들과 봉사 방법을 찾다 시작됐다. “이웃을 돕자는 의견이 많았어요. 할 수 있는 게 옷 팔아 봉사하는 거더라고요.”

바자회 옷은 평소 파는 기성복이다. 국내 최고 디자이너 약 50명이 기증했다. 바자회 옷값은 보통 5만∼10만원 사이다. 시가의 10분의 1 수준이다. 100분의 1 가격에 내놓는 옷도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바자회는 늘 북새통이었다. 도로는 각지에서 몰려온 차로 교통이 마비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바자회 시작 전부터 달려든다. 옷을 한 아름씩 안고서도 다른 옷을 차지하려고 싸운다. 90년대부터 아름다운교회에서 바자회가 열렸는데 예배부터 보자고 해도 물건을 놓는 사람은 없었다. 일부는 옷을 안고 예배를 봤다. 수천 벌을 내놓지만 오후 2시쯤이면 천 조각 하나 남지 않는다.

수익금은 교회를 중심으로 국내외 봉사에 쓰인다. “처음엔 섬 같은 시골에 가서 주민들 돕고 교회 짓는 데 썼어요. 요즘은 아프리카 마을에 우물 파고 병원 교회 짓는 데 써요. 가난한 이웃 돕고 선교하는 거죠.” 설윤형의 설명이다. 이번 바자회는 12일 오전 9시 청담동 아름다운교회에서 열린다.

설윤형과 이주영은 같은 의상 디자이너지만 영역이 판이하다. “엄마랑 저는 소재나 색감을 보는 눈은 똑같지만 스타일은 달라요. 게다가 저는 남성복 위주고요.” 설윤형은 “젊은 세대인 딸이 더 감각적이고 예술성이 강하다. 영어를 잘하니까 세계시장에서도 경쟁력이 있다”며 치켜세웠다. 나란히 앉은 모녀는 친구 같았다. 설윤형은 “이래서 아들보다 딸이 좋다”며 웃었다.

글 강창욱 기자·사진 신웅수 대학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