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조미자] 신의 선물
입력 2011-05-03 18:00
이른 아침 전화가 왔다. 직장의 한참 후배이다. 아내가 하혈을 해서 산부인과에 같이 다녀오겠다고 한다. 물기 젖은 그의 목소리가 힘이 없다. 다른 위로의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서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우리 둘째 가졌어요.” 석 달 전 내 앞에서 자랑하듯 얘기하던 그가 생각났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분명히 떨리는 소리였다. 어두운 조명 아래였지만 나는 그의 눈에서 빛이 나와 잠시 눈이 부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하한다고 그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결혼 후 아이가 늦게 생겨 애를 태웠던 그였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고 아침마다 일어나 새하얀 기저귀를 개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다른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도 기저귀의 포슬포슬한 촉감에 마냥 손을 대고 싶었던 날들. 기저귀를 걷어 들이던 빨랫줄 너머로 홍시 빛 노을이 아름다워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멈춰 있고 싶었다. 가끔 어머니는 전화로 애들 잘 있느냐고 물었다. ‘애들’이란 말을 들으면 머리칼이 쭈뼛 서는 것처럼 긴장되었다. 아이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압박감이 어깨를 눌렀고,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부리면 죄가 되는 것 같았다. 그 당시 애들은 이십대의 내가 살아야 할 이유였다.
세 시간 후 그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유산… 되었습니다.” 오늘 수술이어서 아내 옆에 있겠다고, 내일 출근하겠다고 했다. “어떡하나, 안되어서….” 도무지 근사한 위로의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수화기 저 너머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실제로는 단 몇 초의 시간이었겠지만 내게는 긴 시간이라고 느껴졌다. “○○산부인과라고 했지?” 내가 물었지만 또 빈 메아리였다.
나는 수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지만 눈앞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그의 흰 동자에 붉은 핏발이 서리는 게 보였다. 그 충혈된 눈동자에 차츰 고이고 있는 눈물이 콧등을 타고 흘러내려 한쪽 손등으로 훔쳐낼 그의 얼굴, 잠시 그의 빗어 내린 검은 머리가 한쪽으로 찰랑 휩쓸리는 게 보였다.
어떤 말이 그를 위로할 수 있을 것인가. 세상에 전쟁이 나도 내 허벅지의 종기만 못한 게 인간이 아니던가? 비 맞고 있는 사람에게 우산을 내어주기보다 비를 함께 맞아주는 것.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책상을 서둘러 정리했다. 그가 있는 병원을 찾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찾기에도 마음이 조급했다. 계단의 비상구 표시를 따라 올라갔다. 녹색 정원으로 꾸며진 휴게실에는 마침 아무도 없었다.
진찰실 입구로 가서 작은 메모지를 한 장 얻었다. 둘째 생겼다고 좋아하던 모습이 눈에 선해요. 너무 안타까워하지 마세요. 아기는 신이 주신다잖아요. 첫째 아이 더 키우고 주시려나 봐요. 오히려 이번에 아내 몸을 추스르는 기회가 되길 바라요. 다 쓴 메모지를 접었다. 입원실로 돌아서려는데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옆에는 한지처럼 창백한 얼굴을 한 여자가 서 있었다. 평소 어리게만 보았던 그는 가장이었다. 이 세상, 우주의 한 중심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지구를 두 팔로 떠받치고 있는 힘센 아틀라스의 모습을 보았다.
조미자(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