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빈 라덴 사살] 현상금 5000만달러… 9·11테러 주도한 美 ‘공공의 적’

입력 2011-05-02 22:11


세계를 경악시킨 9·11테러의 주역 오사마 빈 라덴은 지난 10년간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인간이었다. ‘테러계의 북극성’ ‘테러리즘의 대가’ 등이 그를 설명하는 표현이었다.

◇불행했던 어린 시절=그의 정식 이름은 ‘오사마 빈 무하마드 빈 아와드 빈 라덴’. 그는 1957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사우디 왕실과도 가까웠던 그의 아버지는 건설업으로 부를 축적했다. 덕분에 빈 라덴은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 학교를 마친 뒤 상속받은 건설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빈 라덴의 아버지는 이슬람 전통에 따라 여러 부인을 거느렸는데 빈 라덴의 어머니만 사우디 출신이 아닌 시리아 출신이었다. 때문에 빈 라덴의 어머니는 가족들 사이에서 ‘노예(the Slave)’라고 불렸다. 빈 라덴의 호칭은 ‘노예의 아이’였다.

빈 라덴은 52명의 형제 중 유일하게 해외에서 공부하지 못했고, 중동 이외의 지역을 여행하지 못한 자식이었다. 뉴욕타임스(NYT)는 유년기 서양문화를 접하지 못했던 것 때문에 미국을 더 낯설어하게 됐고, 형제들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옛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79년은 빈 라덴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은 해다. 빈 라덴은 소련의 아프간 점령에 반대하는 아랍 저항운동을 이끌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아랍 무장단체인 무자헤딘을 키우는 데 힘을 쏟았다.

◇대미(對美) 성전으로 활동 전환=빈 라덴은 90년대 초반부터 테러리스트로서 활동을 본격화했다. 93년 2월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WTC)에 폭탄 테러를 감행해 6명이 죽고, 수백명이 다쳤다. 96년에는 미국에 대한 성전(지하드)을 다짐하는 회교교령을 3차례 발표하고 “이슬람교도들이 할 수만 있다면 미군과 민간인을 살해하라”고 촉구했다.

테러는 감행됐다. 96년 사우디 군사시설 폭파테러로 미군 19명이 숨졌다. 98년엔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을 공격해 224명을 살해하기도 했다.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빈 라덴을 “첫 번째 공공의 적”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빈 라덴의 공격은 더욱 대담해졌고, 결국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를 붕괴시킨 사상 최악의 테러공격이 이뤄졌다.

9·11 테러 이후의 삶은 숨바꼭질의 연속이었다. 그의 소재가 마지막으로 파악됐던 2001년 12월 미군은 빈 라덴이 숨어 있다는 아프간 산악지대의 토라보라 동굴에 대규모 공습을 감행했다. 하지만 빈 라덴은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 뒤로도 빈 라덴이 아랍권 TV등에 출연해 건재를 과시하면 미군이 공격하는 일이 되풀이됐다.

◇미군에 의한 삶 마감=도피생활은 10년을 채우지 못했다. 미국은 빈 라덴이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 북쪽 100㎞에 있는 외곽 도시 아보타바드의 비밀기지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미 특수부대의 극비 공격작전이 1일 개시됐다. 빈 라덴의 54년 인생은 이날 마감됐다.

영국 BBC는 “빈 라덴은 지지자들에겐 미국과 이스라엘에 항거하는 자유의 투사였고 서방 세계 사람들에겐 수천명을 살해한 테러리스트였다”고 썼다. 파이어니어 프레스는 “빈 라덴은 부유한 집 자녀로 태어났지만 악의 얼굴을 가진 괴물로 삶을 마감했다”고 평했다.

한편 빈 라덴에게 걸려 있던 현상금 5000만 달러(약 532억원)가 누구에게 돌아갈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9·11 테러 후 빈 라덴에 대한 현상금은 2500만 달러였지만 2007년 미 상원에 의해 5000만 달러로 인상됐다. 일부 언론은 작전을 실시한 네이비 실이 어느 정도 몫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김도훈 기자 kinch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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