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임도경] 잊혀질 권리

입력 2011-05-02 17:45


“인터넷에 떠다니는 ‘과거 기사’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전담기관 세워져야”

망각(忘却)은 신이 주신 귀한 선물이다. 우리를 고통에 빠뜨렸던 것과 시간이 지나면 결별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문명은 이런 고귀한 선물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버렸다. 우리의 두뇌가 망각곡선에 따라 자연스럽게 잊어가는 일들을 인터넷은 원본 그대로 잘 보관했다가 즉각적인 원형(原型) 소환에 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언론사 주변에서 묵은 기사의 인터넷 유통에 관한 문제점이 조심스럽게 거론되고 있다. ‘조심스럽게’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언론의 입장과 취재 대상들의 입장에 차이가 나고 있기 때문이다.

신문이나 방송이 주요 매스커뮤니케이션 매체로 자리를 잡고 있을 때는 그래도 인간의 두뇌와 비슷한 망각의 순환구조가 지켜졌다. 매체에 재론되지 않을 경우, 특별히 찾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사건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람들 머리 속에서 지워져 갔다. 하지만 인터넷 발달과 함께 나날이 하이테크화 되어가고 있는 정보사회 속에서 매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정교한 ‘검색’ 기능은 과거와 현재를 순식간에 한 공간 안으로 소환해내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이런 기능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갖가지 정보를 손쉽게 공유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극찬을 받을 만하다. 하지만 ‘잊혀져야 할 사연’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겐 이보다 더 큰 형벌은 없을 것 같다.

인터넷에 있는 과거 기사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는 정확하지 않은 정보가 유통됨으로써 피해를 보는 사례이다. 예를 들면 수사기관으로부터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기사나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기사가 실렸지만, 나중에 이것이 무혐의로 드러나거나 상급심에서 무죄로 번복됐지만 후속기사로 취급되지 않는 경우이다.

두 번째는 진실이지만 그 사실이 지속적으로 공표됨으로써 피해가 끝나지 않는 경우이다. 잘못된 일을 저질렀어도 법적, 행정적 처벌을 받고 나면 법률에 따라 사면과 복권이 이뤄지는데, 이 경우 ‘형의 소멸에 관한 조항’에 따라 공문서상에서도 기록이 삭제된다. 그러나 과거의 잘못으로 인한 기사는 삭제되지 않고 그대로 유통됨으로써 전과기록이 소멸된다한들 실효성이 없어지니 언론에 의한 인권 침해가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법 위에 언론이 있는 것과 같다.

물론 신문이나 방송보도로 인한 피해는 언론중재위원회를 통해서 바로 잡고,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뜬 뉴스로 인한 피해는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바로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제약이 있다. 언론중재는 그 보도가 인지된 지 3개월 이내에만 가능하다. 또 인터넷을 통해 유통된 기존 매체의 뉴스는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 누가 수정의 주체가 될 것인가부터 명확하지 않다.

한국이 이미 가입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1980년 제정한 프라이버시 가이드라인에 의하면, 개인정보의 수집이나 이용에 대한 결정권은 국가나 기업 등 개인정보를 수집해가는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정보의 주체, 즉 국민에게 있다. 이를 정보화 시대의 주요한 인권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이 가이드라인에 따라 많은 국가에서 개인정보보호를 명시한 법률을 제정하고 기구를 만들었는데 한국은 상대적으로 이런 움직임이 뒤늦게 시작됐다. 제도적 뒷받침도 미흡하다.

물론 문제가 되는 모든 기사를 취재원의 요청대로 수정, 삭제할 수는 없다. 기사는 그 자체로 기록된 역사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기사의 대상이 공인이냐 일반인이냐에 따라 마땅히 ‘자기 정보결정권’의 범주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제라도 언론사와 취재원의 입장을 공평하게 판단해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제3의 전담 기관이 나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는 국민들 사이에서 헌법에 아예 ‘잊혀질 권리’를 넣자는 말까지 나오는 답답한 심정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임도경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