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손수호] 저작권의 도전에 직면한 대학
입력 2011-05-03 09:09
지난 주말, 정부의 고시(告示) 하나가 관보에 실렸다. 수업 목적에 이용되는 저작물의 보상금 기준이 나온 것이다. 별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의미는 간단치 않다. 2006년 저작권법에 규정해 놓은 뒤 문화부가 권리자와 이용자간 합의 도출을 위해 고심하다가 이제야 법의 실효성을 확보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는 교육이라는 공공의 목적을 위해서는 저작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대신 이용료를 주도록 함으로써 카피라이트와 카피레프트의 조화를 꾀한 결과다. 대학이 수업목적을 위해 저작물을 이용할 때 미리 허락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 대학이 이용한 후 나중에 적절한 보상금을 내는 것이 핵심이다.
고시 내용은 복제와 배포, 전송, 공연행위를 수업에 활용할 때 글이나 이미지는 A4 1면 분량에 7.7원, 음악은 곡당 42원, 영상물은 5분에 176원이다. 포괄이용은 이보다 훨씬 싸지는데, 현재 1인당 연간 3600원 선에 접근해 있다. 학생 1만명 규모의 대학은 연간 3600만원 정도의 저작물 이용 보상금을 내야 한다는 이야기다.
“수업자료 떳떳하게 쓰라”
여기에 대해 대학은 어정쩡한 태도다. 제도 자체가 워낙 생소한데다 재정에 끼치는 영향도 적지 않아서다. 대학들은 2009년 보상금 기준을 논의할 때부터 협상을 내켜하지 않았다. 그 결과 2년 동안 합의에 실패했고, 그동안 저작물을 수업에 써오면서도 한 푼도 내지 않았다. 그나마 원격교육을 실시하는 사이버대학들이 취지에 공감해 협상에 탄력이 붙었다.
그러나 저작물에 대한 보상금은 피할 수 없는 잔이다. 남의 저작물을 이용하고도 입을 닦겠는 것도 비지성적이다. 최고의 지식인 집단이 저작권을 기피하는 것 또한 지식기반사회의 아이러니다. 교수들은 남의 저작물을 이용하면서도 스스로 저작자인 경우가 많으니 제도의 최고 수혜자가 될 수 있다.
선진국에는 공짜가 없다. 유사한 제도를 운용중인 호주는 학생 1인당 연간 38호주달러(4만1800원)를 낸다. 우리의 10배 수준이다. 미국은 더 엄격하다. 복제가 도서의 구매를 대체해서도, 교사가 학기마다 같은 자료를 반복적으로 복제해서도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1면 복제에 2달러 정도를 내야 한다.
관건은 대학의 지불능력이다. 보상금 지불 주체가 학생이 아니라 학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대학의 과감한 인식전환이다. 이 제도가 저작권자 일방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용자에게도 득이 된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교수와 학생들이 저작권 시비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저작물을 마음껏 이용할 때 수업의 품질이 향상됨은 불문가지니 기피할 이유가 없다.
요즘 강의에는 교수와 학생 간의 쌍방향 소통은 물론 동영상과 음악, 이미지 등 각종 멀티미디어 자료를 활용한 방법이 대세다. 과목마다 카페를 개설해 과제를 올리고 여기에 교수들이 참여하는 모습도 자주 본다. 적극적인 교수일수록 저작물 이용이 활성화될 수밖에 없다. 저작권이 두려워 책 한권을 놓고 읽고 판서(板書)하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교육품질 위해 정부지원 필요
따라서 대학도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 학생들의 공부를 위해 도서를 구입하듯이 저작물 이용에 대해 합당한 지출을 당연히 여겨야 한다. 학생 1인당 1년에 책 1권을 구입한다는 자세를 가진다면 보상금 부담이 그렇게 고통스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저작자가 많은 대학은 전체적으로 플러스가 될 수도 있다.
다만 일시적인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보상금 일부에 대해 정부가 지원하는 것이 좋겠다. 강의평가에 따라 차등지원하는 방법도 있다. 그 돈에 손이 오그라들어서는 안된다. 뭐니뭐니해도 학생들 수업의 질을 높이는 데 쓰는 돈이 가장 공공적인 지출이니까.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