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독교 성지 순례] 독립투쟁 역사 뒤편에 서린 복음의 숨결
입력 2011-05-01 18:01
(8) 서울 서대문독립공원
서울 서대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문이다. 돈의문(敦義門)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지만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라 철거됐다. 돈의문 앞 길 이름은 ‘세종 때 새로 세운 문’이라는 뜻의 신문로(新門路)다. 역시 그 형체는 남아 있지 않다. 왜일까.
서울시 현저동 서대문독립공원에 가보면 어렴풋이 답을 찾을 수 있다. 이 공원은 항일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성지다. 독립문과 독립관, 서재필 동상, 3·1운동선언 기념탑,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등의 조형물만 보면 반일정신을 일깨우는 공간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독립문은 항일독립운동 상징물 그 이상=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4번 출구로 나오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인 독립문이 나온다. 문 앞엔 주춧돌 2개가 마치 손 들고 벌을 선 모습을 하고 있다. 도대체 누가 왜 이 불협화음의 석물을 신성한 독립문 앞에 세워놓았을까. 독립문을 지나기 전 오른쪽에 있는 관광안내 표지판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독립문이 세워질 무렵 19세기 한반도는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더 이상 낡은 세계관과 가치관으론 밀려오는 서구식 자유화 파고를 막을 수 없었다.
이에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윤치호 등은 이미 선진화한 일본과 미국을 돌아보면서 개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당시 조선은 중국의 대륙문명권의 전통을 지속하려는 ‘위정척사파’와 서양의 해양문명권의 전통을 이어받으려는 ‘문명개화파’ 두 세력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다.
독립문의 ‘독립’은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오래 전부터 기획된 것이었다. 마침내 서재필은 1884년 12월 김옥균 박영효와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거사는 3일도 못가서 발병이 났다. 서재필의 가족은 멸족당했으며 그는 간신히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는 일본에 머물던 루미스 선교사의 집에 머물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기독교 신자가 됐다.
이후 컬럼비아대학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1893년 의사면허증을 받았다. 망명한 지 11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온 서재필은 관직을 맡고 본격적인 개혁운동을 일으켰다. 민족계몽 운동을 통해 근대국가를 만들기 위한 개혁을 시도했다. 가슴속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열정이 가득했다.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은 한국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7월 2일에는 관·민 합동으로 독립협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외세의 교활한 간섭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라의 진정한 독립을 꿈꾸던 이들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외세로부터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을 부수고 독립문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국왕도 동의를 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1897년이었다. 마침내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 뜬 독립문을 완공됐다. 모화관(慕華官) 자리엔 독립관을 세웠다.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배재학당에서 토론모임인 만민공동회를 만들어 정부를 비판하며 개혁을 요구했다. 그러나 관료들의 반발로 개혁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1898년 5월에 미국으로 다시 건너갔다. 결국 독립협회의 해산으로 끝났지만 그 영향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후 국권회복운동과 애국계몽운동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1919년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원동력이 됐다.
◇항일운동 성지 서대문형무소역사관=독립문과 독립관은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와서 사회를 민주화와 선진화로 변화시키는 출발점이었다. 순국선열의 위패가 봉안돼 있는 독립관을 지나면 3·1독립선언 기념탑이 나온다. 탑 뒤에는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분의 이름이 판각돼 있다. 33인 중 반 이상이 크리스천이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서대문역 5번 출구와 가깝다. 1908년 경성감옥으로 문을 연 이후 유관순 열사 등 수많은 크리스천 애국인사와 항일투사들이 체포, 투옥되어 곤욕을 치른 곳이다. 유 열사는 꽃다운 나이에 지하 감방에서 장엄하게 순국했으며 백범 김구 선생 등이 애국투혼을 불살랐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백범은 1905년 감리교회 단체인 ‘엡윗청년회’의 활동을 하면서 도산 안창호, 전덕기 목사, 이승훈 선생 등과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를 조직했다.
김구 선생은 1910년 일제가 교회를 말살하기 위해 조직한 ‘105인 사건’ 때 구속돼 17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고 이곳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아들을 위해 평생을 기도했다. 아들의 옥살이를 슬퍼하지 않고 “경기도 감사를 하는 것보다 더 낫다”면서 “네 믿음이 너를 살려 줄 것이니 안심하고 반드시 큰일을 해야 한다”고 아들을 격려했다.
해방 후에는 중국에서 귀국, 남과 북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인한 분단을 막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기 1년 전 1949년 6월 26일 주일 12시50분쯤 안두희가 쏜 흉탄 4발을 맞고 백범은 74세의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서대문 인근 경교장에서였다. 지금은 강북삼성병원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백범은 유명을 달리하면서도 ‘나의 소원은 조국의 통일’이라는 기도를 드렸다.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