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1) 중국서 드린 주일예배가 사역의 단초

입력 2011-05-01 17:46


1992년, 35세의 나는 청년사업가로 자신만만한 삶을 살고 있었다. 막 개방을 시작한 중국과 무역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윤택했고, 신앙적으로도 안수집사 임명을 받아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고 있는 때였다.

빨리 안수집사가 될 수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출석하던 교회에서 ‘예수초청잔치’를 열었는데 성격이 활달하고 적극적인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전도에 한번 ‘올인’해 보기로 작정했다. 당시 수천 명을 전도했다는 주안장로교회 안광자 권사(당시는 집사)의 간증을 듣고 크게 자극을 받은 것이다.

업무는 접어두고 회사가 있는 서울 장안동 일대를 누비며 전도를 시작했다. 이렇게 내가 만난 사람이 석 달이 좀 넘는 동안 2300여명이었다. 교회에 와서 등록한 사람도 267명이나 되었다. 주변에서 나를 ‘전도왕’으로 불러주기 시작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난 과정도 좀 특이하다. 단기하사로 군복무를 했던 나는 교회완 전혀 상관없었고 또 신앙을 가질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제대를 1년여 남기고 대대장이 바뀌었는데 신임 대대장(서상건 중령)과 사모님이 독실한 신앙을 가지신 분이었다. 부대 안에 교회가 없자 사비로 교회당을 지은 뒤 나를 부르셨다.

“서 하사! 부대에 신우회가 없는데 자네가 회장을 좀 맡아주겠나? 자네 이름과 내 이름이 비슷하니 뭔가 통할 것 같아서라네.”

‘서베드로’란 이름으로 바꾸기 전 내 이름은 ‘서상호’였다. 군대는 명령이기에 예수님을 전혀 모르던 내가 하루 아침에 신우회장이 됐다. 그리고 사병들을 주일마다 교회로 불러 모으는 역할을 하고 예배를 드리면서 자연스레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제대 후 모태신앙인인 아내와 결혼을 했고 28세에 서리집사가 되고, 청년부 회장을 했으니 하나님의 섭리가 놀랍기만 하다.

이처럼 사업과 신앙 모두 혈기왕성하던 92년 8월, 내 인생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중국에서 조선족 동포들이 많이 사는 지린성(吉林省) 성장이 한국의 기독 중소기업인들을 초청했다. 사업 관계를 원활히 하고 중국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져 달라는 의도 같았다. 나도 이 참관단에 끼게 됐다.

우리는 일정 중 현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요청했다. 그러자 우리를 한족 삼자교회인 창춘(長春)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기 전이었다. 반공교육을 받으며 자란 우리가 중공(中共)으로 불리던 동토의 땅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창춘교회엔 3500여명의 성도들이 모였다. 예배를 모두 중국어로 진행해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이 중국 땅에 복음이 전파돼 13억 인구 모두 예수를 알게 되길 간절히 기도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중에 함께 예배 드렸던 한 중년 부인이 내 옷자락을 슬쩍 잡으며 특유의 북한 사투리로 조용히 말을 건넸다. “선생님, 조선 사람이 한족 예배만 참석하고 조선족 예배에는 참석 안 하십네까?”

깜짝 놀랐다. 난생 처음 온 중국 땅에서 조선말을 하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이 한족 예배에 조선족이 참석하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과의 만남이 내가 현재까지 19년간 중국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게 되는 첫 단추였음을, 이때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서베드로 원장 약력=1958년 서울 출생. 아가페사랑회 회장. 열방영어대학원대학교 학장. 베이징 사랑의 쉼터 원장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