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디지털과 빛으로 새 생명을 얻다… 강애란 ‘빛을 발하는 시’ 展
입력 2011-04-29 17:58
전시장 입구에 불빛이 반짝이는 책들이 놓여 있다. 책에는 에드가 앨런 포, 윌리엄 셰익스피어, 로버트 프로스트, 로드 바이런 등 시인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 가운데 포의 책을 집어 전시장에 있는 선반 위에 놓으니 그의 시 ‘꿈 속의 꿈(A dream within a dream)’을 읊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전시장 벽면에서는 시의 텍스트가 영상으로 상영되기 시작한다.
책을 소재로 빛과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작업에 매달리는 강애란(51·이화여대 교수) 작가의 관객 참여형 설치작품 ‘빛을 발하는 시(Luminous Poem)’이다. 전시장 한가운데에는 책꽂이 모양의 거대한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문을 열고 조형물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앞서 선택했던 책의 내용이 눈앞에 펼쳐지며 마치 책 속의 세계로 들어간 듯 환상적인 분위기에 휩싸인다.
서울 통의동 갤러리 시몬에서 오는 29일까지 개인전을 여는 작가는 그동안 책 모양의 플라스틱 박스에 LED 조명을 넣어 빛을 내는 ‘디지털 북’ 시리즈에서 한 걸음 나아간 작품들을 선보인다. 특히 그림과 LED 조명을 결합한 작품이 눈에 띈다. 에두아르 마네와 에드가 드가 등의 화집을 그린 것 같지만 불을 끄면 책 밑에 조명이 들어오며 글자들이 지나간다.
1997년부터 디지털 북 프로젝트를 진행한 작가는 “원래 회화를 전공했으니 그림에 대한 향수 같은 게 있었다”면서 “하지만 책은 비물질적이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가상의 공간인 반면 사진이나 그림은 멈춰 있는 상태라 책의 무궁무진한 내용을 가시화하기에는 맞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움직이는 텍스트를 넣는 방법으로 ‘읽는 책’이 아닌 ‘인식하는 책’을 만들었다.
국내외 유수의 전시에서 주목받은 그의 작품은 단순히 책에 빛을 불어넣은 오브제라는 개념을 넘어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시학적 미장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디지털 북을 서가처럼 배열한 전시장에 거울을 붙여 공간감을 더한 작업과 렌티큘러(보는 각도에 따라 이미지가 다르게 보이는 기법)를 활용한 작품 등이 함께 소개된다(02-720-3031).
이광형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