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 까무룩 잊고 있다 깨달은 ‘자의식’… 이청해 창작집 ‘장미회 제명사건’
입력 2011-04-29 17:51
기억의 창고에 불이 켜지는 나이가 있다. 불빛은 환갑을 넘긴 어느 날 불현듯 삶의 내부에서 기억의 지층을 뚫고 밖으로 새어나온다.
소설가 이청해(63·사진)의 다섯 번째 창작집 ‘장미회 제명사건’(민음사)에서 그려내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그런 기억의 불을 켜들고 있다. 그 불은 나이도 잊은 채 허겁지겁 살아온 자기 자신이 아니라 외부적 동기에 의해 주어진다.
수록작 ‘시크릿 가든’의 주인공 ‘나’가 켜든 기억의 불은 20여년 만에 모국을 찾은 미국 국적의 옛 친구 선영이와 그녀의 남편 리처드와 함께 비원을 관람하면서 문득 켜진다. 결혼 직전에 남자의 호적에 이미 다른 여자의 이름이 올라 있다는 충격으로 인해 파혼한 이후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나’는 자신이 단 한번도 남자와 잠자리를 갖지 못한 사실이 너무나 억울하다. “리처드와 선영을 힐끔 바라봤다. 다행히도 두 사람은 서로를 애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누구와 저런 짓을 해보지? 내겐 언제나 그 대상이 문제였다.”(16쪽)
‘나’는 자신에게 남성의 육체에 대한 혐오감 내지 결벽증이 있었다는 것을 어렵게 기억해낸다. 사춘기 시절 아버지가 가까이 오면 몸을 뒤로 뺐던 것은 아버지의 몸에서 노린내가 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처녀로 늙어가고 있는 자신의 몸을 이토록 외롭게 만든 일종의 강박은 비원의 오래된 풍경 속을 걸어가면서 이런 대사를 읊조리게 한다. “500년간 숲에 갇혀 있었던 비밀들이 으으 신음을 내뿜는다. 중전마마의, 빈들의, 상궁의, 내시의, 대감의…궁궐 전체의 사생활이 와글와글 끓어오른다.”(40쪽)
단편 ‘지리산’의 주인공 ‘나’ 역시 30년 만에 우연히 대학 선배 강형을 만나면서 기억의 지층에 불이 켜진다. 둘은 귀국해서 함께 지리산 등반을 가기 위해 고속버스에 올랐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버스 천장에 매달린 텔레비전을 통해 알게 된다. ‘나’는 “실족이야, 자살일 리 없어”라든지 “유서 조작하는 거야 일도 아니지”라든지 “좌파는 입 다물어”라고 여과 없이 내뱉는 강형이 왜 극우파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그러다 알게 된다. 강형의 아버지가 노상 여당을 지지하지 않으면 먹고살기 힘든 경찰공무원 출신이었으며 그 보수성이 아들인 강형에게도 유전되고 있다는 사실을. “개인이 가진 정보의 총합이 자아라고 하던가. 강형의 정보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아버지와 관련된 것이 많을 것이다. 후성유전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83쪽)
표제작의 주인공 ‘수자’는 명품으로 치장하고 정기적으로 골프 모임을 갖는 여고 동창생들의 모임 ‘장미회’ 회원이다. ‘수자’는 대기업 임원이었던 남편이 구조조정 탓에 퇴출된 직후 장미회 회원들의 눈총을 받는다. “수자는 떨어진 꽃잎이므로 이제 상대할 필요도 눈치 볼 필요도 없다는 작태였다. 남편들의 성공과 더불어 남 무시하는 기술만 발달시켜 온 인간들이었다.”(238쪽)
수자가 장미회에서 자신을 제명하기 전에 스스로 퇴진하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여고 졸업 후 동네 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동창 한효원 덕분이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효원과의 재회는 장미회와의 단절을 보상하고도 남는다. 게다가 효원은 자신의 이름으로 모교에 장학금을 기탁할 만큼 영특하고 품이 넉넉한 친구다. 수자는 나이 먹은 여자들이 중후해지는 건 자식이 있다는 것에 있다, 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오랜 만에 깊은 잠에 빠져든다.
이렇듯 창작집의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의 후반기 인생에 담긴 의미를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들은 비록 “소녀는 나이가 들어 추루하게 동굴 안에 엎드려 있었다”(표제작)라는 문장처럼 생의 비애를 간직하면서도 기억의 깊이 속으로 두레박을 드리운 채 ‘잘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가 이청해는 나이 듦이란 자의식의 반성이 작동되는 또 다른 발견의 시작임을 자분자분한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