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타인의 상처를 온전히 어루만질 수 있을까… 조해인 장편 ‘로기완을 만났다’

입력 2011-04-29 17:52


타인에 대한 연민은 가능한가.

이 철학적인 질문은 젊은 소설가 조해인(35·사진)의 장편 ‘로기완을 만났다’(창비)를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연민의 실체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오는 자족감으로 한동안 뿌듯해진다. 소설은 첫 문장 “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았다”(7쪽)와 마지막 문장 “로, 이것이 바로 내가 들려주고 싶은 나의 이야기다”(189쪽) 사이에 걸쳐진 3주간의 이야기다.

소설에서 이니셜 L로 표기되는 ‘로기완’은 함경북도 온성 제7작업반에서 태어나 자랐고 생존을 위해 홀로 이역만리 벨기에로 밀입국한 스무 살 청년이다. 함께 북한 국경을 넘은 어머니가 중국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그는 자신이 살아남는 것이 곧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이었음을 알고, 어머니의 사체를 팔아 마련한 돈 650유로를 품에 안고 브뤼셀에 도착한다. 소설의 진경은 로기완의 행적을 추적하는 소설 속 화자 ‘나’의 진술 자체에 있다.

“연민이란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어떻게 만들어져서 어떻게 진보하다가 어떤 방식으로 소멸되는 것인가. 태생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그 감정이 거짓 없는 진심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포기되어야 하는 것일까”(48쪽)

‘나’는 불우한 이웃들의 사연을 다큐로 만들어 실시간 ARS를 통해 후원을 받는 방송 프로그램의 작가이자 연민 때문에 상처 받은 자다. 부모를 여의고 반지하방에서 뺨에 커다란 혹을 단 채 힘겹게 살아가는 윤주의 후원금을 늘리기 위해 ‘나’는 윤주의 사연을 담은 프로그램의 방송 날짜를 추석연휴로 미룬다. 그 늦춰진 기간은 혹이 악성 종양으로 바뀌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신의 연민으로 희망을 품게 된 윤주가 오히려 더욱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사실에 충격을 받은 ‘나’는 현실과 마주할 용기를 잃은 나머지 우연히 읽게 된 시사잡지에서 탈북자 로기완의 이야기를 접하자마자 무작정 벨기에로 떠난다. 그곳에서 로기완이 난민 지위를 얻는 데 도움을 주었던 한인 의사 ‘박’으로부터 로기완의 일기장을 입수한 ‘나’는 그의 남긴 행적을 찾아 나선다.

“오후에 이곳으로 돌아와 로가 처음 한 일은 수돗물을 마시는 것이었다. 목까지 물이 차올랐다는 느낌이 들면 로는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저녁에는 더 이상 산책을 나가지 않았다. 그저 어둠 속에서만 겨우 생존하는, 즐겁고 신나고 설레는 감각 같은 것은 모두 퇴화된 불우한 생명체처럼, 매순간 목숨을 걸고 살아남아야 했던 과도한 생존에의 욕구를 잠시 비웃기도 하면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무의식 저편으로부터 끊임없이 불안한 잠을 불러들였을 뿐이다.”(105쪽)

로기완의 행적을 쫓는 이러한 취재과정은 이 작품이 분단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 않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분단체제의 비극성과 더욱 간극이 커진 작금의 남북관계가 초래한 많은 문제들을 환기시킨다. 요컨대 소설의 미감은 탈북자들을 다룬 작품이 흔히 빠지기 쉬운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묘사와는 그 궤를 달리하는 작가의 절제된 서술에 있다.

“로도 알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시신을 내준 대가로 자신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얼마나 많은 순간을 뼈를 녹이는 듯한 후회와 고통으로 견뎌야 할지에 대해. (중략) 로가 들여다보게 될 거울은 언제까지고 자기모욕적인 언어로 얼룩져 있을 터이다. 나는 지금 로의 시간이 궁금하다.”(123쪽)

소설을 빛내는 또 한 가지는 조해진 자신이 벨기에로 취재 여행을 떠나 로기완이 겪었을 그 고난의 행군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았다는 사실에 있다. 이 과정은 작가로서의 삶을 근본적으로 고민하는 ‘나’의 구도 과정이기도 하다.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상상하고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 나의 몫이겠지만 때때로 그 과정이 이기적인 욕심에서 비롯된 건 아닌가, 라는 냉정한 질문을 나는 제대로 통과하지 못했고 사실은 지금도 통과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고 말하는 조해진의 글쓰기는 그래서 더욱 신뢰가 간다. 로기완의 시간과 윤주의 시간, 그리고 작가 자신의 시간이 하나로 뭉쳐지고, 이 삼위일체의 언어적 무늬가 긴 파장을 남기는 소설이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