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리와 흔들고 승원에 꽂히고 태임에 홀리고… 5월 대학은 취한다
입력 2011-04-28 19:49
중간고사가 끝났다. 연세대 3학년. 군대 갔다가 지난해 복학했다. 철 좀 들려고 도서관에 간다.
신촌역 3번 출구 홍익문고 쪽으로 나오면 매일 아침 걷는 통학로다. 주민들은 명물거리, 학교에선 연세로라고 부른다. 중간쯤 있는 횡단보도에서 녹색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는데 7727번 버스가 지나갔다. 버스 옆구리 광고판에 쇄골을 훤히 드러낸 채 비스듬히 누워 있는 이효리. “흔들어봐∼ 한번 더 부드러워져”라고 속삭인다. 그녀가 흔들라는 건 소주 ‘처음처럼’이다.
생수 사러 학교 앞 편의점 바이더웨이에 들어갔다. 붉은 바탕의 광고 전단지가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붙어 있다. ‘편의점 베스트 상품 24시간 가격 인하.’ 소주를 1100원에 판단다. 이런 걸 아침부터 찾는 사람도 있나? 하긴 근처에 술집만 수백 곳이니… 이렇게라도 팔아치워야겠지.
오후엔 과외 아르바이트 하러 여의도에 가야 했다. 신촌역 7번 출구 앞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오늘따라 버스가 오지 않아 택시 정류장으로 가는데 차승원이 ‘아사히’ 맥주를 들고 날 째려본다. 광고판에 적힌 글귀는 ‘좋은 맥주의 확실한 증거 엔젤링’. 아이폰으로 검색해봤더니 엔젤링은 맥주 거품이 컵에 남긴 링이라고 한다.
신촌 로터리 부근 영화관은 나와 여친(여자친구)의 단골 데이트 코스다. 해질 무렵, 상영시간을 10분 남기고 들어갔는데 스크린에선 한창 광고가 돌아가고 있었다. 아침에 버스 옆구리에서 봤던 이효리가 이번엔 핫팬츠 차림으로 ‘처음처럼’을 들고 마구 몸을 흔들었다. 이 광고가 스크린에 두 번째 나왔을 때, 여친은 영화 언제 시작하느냐며 짜증을 냈다.
영화 봤으니 집에 가자, 하면 ‘성실한 남친(남자친구)’이 아니다. 맛있는 걸 사줘야 한다. 신촌역 앞 ‘쫄병 부대찌개’에 갔다. 차태현과 전지현이 영화 ‘엽기적인 그녀’를 촬영한 곳. 벽에 ‘백세주’ 광고 포스터가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다. 배가 살짝 나온 송강호는 작게, 가슴골 깊은 이태임은 크게 확대돼 있다.
복학했으니 술 좀 덜 마시고 철들겠다던 말, 진심이었다. 그런데 이쯤 되면…흔들고, 째려보고, 가슴골로 유혹하는데 나보고 어
쩌라는 거냐. ‘백세주’와 ‘처음처럼’을 섞어 마셨다.
늦은 밤 집에 가려고 지하철 신촌역의 시청 방향 승강장에 섰다. 이런. 스크린도어 광고판에서 오지호와 김성수가 나를 보며 웃는다. “헛개나무로 집 지으면 그 집안에 있는 술은 모두 맹물이 된다”며 헛개 컨디션 음료 ‘파워’를 권한다.
이 얘기는 어느 연세대 복학생의 농담 섞인 하소연을 재구성한 것이다. 대학가에서 누구나 일상적으로 겪는 ‘술의 유혹’. 혹시 당신, 지금까지 그 유혹을 이겨냈다고 자부하는가? 자신하지 말라. 본게임은 이제부터다. 4월 중간고사 끝나고 축제 시즌에 접어드는 5월. 전국 대학가에서 곧 펼쳐질 수많은 주류업체 술 마케팅은 당신의 상상을 초월한다.
축제 때 학과나 동아리마다 운영하는 주점을 ‘엣지’ 있게 만들어 주는 게 출발점이다. 지난해 5월 참이슬은 전국 대학생들을 상대로 ‘우리만의 주막 만들기’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참이슬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학과·동아리 단위로 스토리를 공모하고, 당첨되면 천막 탁자 같은 기본 물품과 함께 소주를 대량 제공했다. 하이트는 연세대 축제기간에 30명 이상이 단체로 “하이트”를 외쳐 가장 높은 데시벨을 기록한 팀에게 맥주 125캔을 쐈다.
올해는 “매일 13병씩 마시면 항암효과를 볼 수 있다”는 막걸리가 대학가 축제에 도전장을 냈다. 우국생을 만드는 국순당은 ‘우리 술상 in 캠퍼스’ 행사를 기획했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술 판촉 아이디어를 내서 채택되면 주점에 필요한 물품과 술은 물론 100만원의 상금도 준다.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3개 팀에게는 국순당 입사시험에서 가산점까지 주어진다.
주류업체는 영리하다. 스펙과 취업이 절실한 88만원 세대의 약점을 정조준한다. 하이트는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하이팸 행사를 진행했다. 하이팸은 하이트 맥주 대학생 홍보대사를 일컫는다. 안내문에는 ‘대학생활에서 경험하기 힘든 마케팅 실무를 현장에서 직접 경험할 수 있다’거나 ‘미션 수행 시 상금 지급’ ‘우수 수료자 해외 탐방’ 등의 ‘혜택’이 나열돼 있다. 각 대학에 흩어져 하이트 맥주를 홍보한 대가로 하이팸 소속 1∼5기 학생들은 지금까지 유럽과 일본 등 해외연수 기회를 얻었다.
공부만 하다가 놓치기 쉬운 봉사 경력 ‘스펙’도 주류회사가 챙겨준다. 진로는 50명 규모의 대학생 두꺼비 봉사단을 30일까지 모집하고 있다. 다음 달 20일부터 사흘간 강원도 춘천에서 사랑의 집짓기 행사를 한다. 여름이면 대학생들과 함께 래프팅 원정대를 만들고, 겨울이면 대학생 스키·보드 캠프를 꾸리던 것과는 분명 다른 흐름이다.
동국대 조형오(광고홍보학) 교수는 이를 “오도하고 기만하는 마케팅”이라고 말했다. 대학에서 음주가 허용된다 해도 마케팅에는 문화적으로 수용되는 적정선이 있다. 취업을 미끼로, 해외연수를 경품으로, 봉사 경력을 챙겨주는 조건으로 대학생들에게 ‘친구들이 더 많이 술을 마시게 할 전략’을 짜오라고 시키는 건 그 적정선을 넘었다는 지적이다.
더구나 대학생은 일반 성인에 비해 월간 음주율(한 달에 한 번 이상 술을 마신 비율)이 월등하게 높다.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KARF)가 지난 2월 조사해 발표한 전국 대학생 음주실태 보고서를 보면, 19세 이상 성인의 월간 음주율은 58.4%에 머물렀으나 대학생은 무려 85.4%였다.
비판 여론이 일자 하이트는 올해 하이팸 6기 모집을 잠정 중단했다. 하이트 홍보팀 관계자는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학기 초에 학생들 음주사고도 나고 해서 일단 중단했다”며 “내년에 다시 할지는 아직 미정”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음주사고의 주인공은 연세대다. 지난 2월 건축학과 학생이 경기도 가평에서 열린 신입생 환영회 엠티에 참석했다가 술에 취해 추락사했다. 축제를 준비하는 마음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연세대 총학생회는 축제가 시작되는 5월 11일부터 이틀간 학내 백양로의 차량 통행을 막고 거리주점 65개를 설치한다. 여기에 참여하려는 학과나 동아리 수는 그 배가 넘는다. 그래서 하루씩 나눠 쓰기로 했다. 같은 주점 자리를 하루는 정치외교학과, 다음날은 신문방송학과가 쓰는 식이다.
총학생회는 이틀간 약 1만병의 소주가 필요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맥주는 그 몇 배가 될지 짐작하기 어렵다고 한다. 학과와 동아리의 구매 요청을 취합해 봐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총학생회 관계자는 “주류업체 판촉행사를 막아도 마치 점조직처럼 선후배 관계를 이용해 들어온다”고 했다. 주류업체는 판촉 대행업체를 이용하고, 대행업체는 도우미를 동원해 행사를 벌인다. 이 관계자는 “사고가 나지 않으려면 최대한 일찍 정리하는 게 요령이다. 거리주점의 조명을 밤 11시쯤 꺼버리는 방법도 쓸 것”이라고 말했다.
술은 세법에 의해 출고 가격을 국가가 통제한다. 참이슬은 889원, 처음처럼은 869원이다. 유통비용은 거의 고정돼 있다. 이익을 남기려면 친근한 톱스타를 내세워 술에 대한 거부감을 최대한 없애고 자연스럽게 마시도록 하는 수밖에 없다. 갓 성인이 된 대학생과 주요 고객층으로 떠오른 여성들이 주류업체의 정체된 매출을 뚫어줄 돌파구다.
주류업계 광고 전쟁은 흔히 ‘KT의 올레 대 SKT의 티’ 브랜드 전쟁과 비교된다. 하이트가 광고모델로 빅뱅을 들고 나오면 오비맥주는 2PM을 등장시킨다. 카스 라이트의 싸이를 모델로 저칼로리 맥주를 권하자, 하이트는 두 ‘빈’을 내세웠다. 현빈과 원빈이다.
최근 참이슬의 광고모델 이민정이 부지런히 소주를 권하고 있지만, 아직 처음처럼 이효리의 인기를 무너뜨리진 못했다. 보통 6개월 단위로 모델이 바뀌는 판에서 이효리는 3년을 넘긴 국내 최장수 여성 술광고 모델이다. 맥주와 소주 업계 1위인 하이트와 진로는 각각 1065억원과 502억원을 광고선전비로 지출한다. 매출액의 10%와 7%를 쓰는 것이다.
지난 26일 찾아간 사단법인 청소년흡연음주예방협회 냉장고에는 국내에서 생산·유통되는 모든 술이 들어 있었다. 지난해 8월 협회는 70개 주류 제품을 구입해 청소년에게 팔 수 없다는 경고 문구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측정했다. 0.01㎜ 오차까지 잡아내는 디지털 캘리퍼스를 이용했다.
청소년보호법은 이 문구가 상표 면적의 20분의 1을 넘도록 규정하고 있다. 조사 결과 대부분이 100분의 1 이하였다. 모든 주류회사가 청소년보호법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뉴스는 다음날 신문과 방송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협회 이복근 사무총장의 말이다.
“그게 주류회사의 힘입니다. 술과 담배 광고 싣지 않는 국민일보 말고는 주류업계가 쏟아 붓는 광고 물량에 언론이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