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의 씨네마 부산-PIFF 15년의 기록 (15)] 부산이 키운 ‘똥파리’ 화려하게 날다
입력 2011-04-28 18:03
2005년은 부산영화제 1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10년’을 여는 첫해가 되도록 중지를 모았고 백방으로 뛰었습니다. 10주년 사업비로 국비 5억원과 시비 5억원을 확보했습니다. NHN 3억원, 롯데엔터테인먼트와 SK텔레콤에서 각 2억원 협찬을 새로 얻어 가용예산은 전년보다 21억원 증가한 61억3000만원이었습니다.
10주년을 기념하는 몇 가지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우선 초청 작품과 초대 인사를 늘려 73개국 307편(2004년은 66개국 263편)의 영화가 상영됐습니다. 개막작은 ‘쓰리 타임즈’(허우샤오시엔), 폐막작은 ‘나의 결혼원정기’(황병국)였습니다.
허우샤오시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심사위원장·이란), 피터 그리너웨이(영국), 스즈키 세이준(일본), 크지시토프 자누시(폴란드) 등 거장감독들이 부산을 찾았고, 청룽(홍콩), 오다기리 조(일본), 첸상치(대만), 양궤이메(대만) 같은 배우들이 레드 카펫을 밟았습니다.
부산영화제 10년의 역사를 책자와 화보 두 권에 담아 출판했습니다. 해운대 해변에 컨테이너 박스로 전시장을 만들어 10주년 사진전과 새로 지을 부산영상센터 ‘모형전시’도 했습니다. 컨테이너 박스는 다음해부터 ‘피프센터’로 조성돼 항구도시 부산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영화제 명물’이 됐습니다.
제10회 영화제 포스터는 특별히 이만익 화백이 디자인했습니다. 저는 포스터 디자인을 허황(4회), 이성자(4회), 이화자(5회) 등 부산의 회화과 교수와 남천 송수남(6회), 유산 민경갑(7·8회), 일랑 이종상(9회) 화백에게 부탁해왔습니다.
10년간의 성원에 감사하는 오픈 콘서트 ‘시네마틱 러브’, 감독 배우와 함께 영화 보는 ‘시네마 투게더’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향후 10년 ‘새로운 도약’을 담보하는 세 가지 사업에 착수했습니다.
아시아영화아카데미
그 첫 번째는 아시아영화아카데미(AFA)를 창설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영화교육기관이 과도할 정도로 많지만, 아시아 각국엔 영화지망생은 많아도 전문 교육기관은 매우 적습니다. 영화강국 일본이나 연간 1000편 이상 만드는 영화대국 인도조차 그렇습니다. 이 점에 착안했습니다.
베를린영화제는 2003년부터 ‘탤런트 캠퍼스’를, 선댄스영화제는 오래전부터 영화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해 왔습니다. 저는 2005년 1월 처음 선댄스영화제를 찾았고, 2월 베를린에 갔습니다. 동행한 신정화 팀장을 선댄스 ‘프로듀서 랩’과 베를린 ‘탤런트 캠퍼스’에 참가시켰습니다.
인도 ‘오세안 시네판’ 영화제(7월)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독립영화제(4월)는 2005년부터 베를린영화제와 공동으로 ‘탤런트 캠퍼스’를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를린과 뉴델리에서 관계자를 만났을 때 ‘탤런트 인 부산’을 제의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베를린과 선댄스를 벤치마킹하되 우리 실정에 맞고 교육효과가 극대화되도록 ‘재창조’하자는 생각에서 만든 것이 아시아영화아카데미입니다.
탤런트 캠퍼스는 대체로 5일간 영화인 500명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하지만, 아시아영화아카데미는 영화지망생 24명을 3주간 무료로 집중 교육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동서대학교와 한국영화아카데미가 공동 주관해왔고, 올해부터 한국영화아카데미 대신 부산영상위원회가 참여할 계획입니다.
대만의 허우샤오시엔, 한국의 임권택, 이란의 모흐센 마흐말바프, 일본의 구로사와 기요시,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등 세계적 거장감독들을 역대 교장으로 모셨습니다. 논지 니미부트르(태국), 펜엑 라타나루앙(태국), 브리얀테 멘도자(필리핀), 유릭 와이(중국), 아서 웡(홍콩), 마흐무드 칼라리(이란) 그리고 배창호, 박기용, 문승욱, 김형구, 박기웅 등이 아카데미의 교수로 참여했고, 매번 8∼10명의 강사가 초빙됐습니다. 이들이 24명을 교육시킨 것이죠.
작년까지 6회에 걸쳐 14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상당수가 감독으로 데뷔해 부산영화제에 참가했을 뿐 아니라 칸과 베를린영화제에도 초청받기 시작했습니다. 10년 후에는 세계적인 감독이 이들 중에서 나오리라 믿습니다.
아시아필름마켓
2006년 아시아필름마켓(AFM)을 창설했습니다. 필름마켓이란 영화를 ‘사고파는’ 시장인데 이를 석권하려는 각국 또는 영화제 간 각축전이 매우 치열합니다. 오래전부터 2월에 개최하는 미국영화시장(AFM)과 11월의 밀라노영화시장(MIFED)이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5월에 열리는 칸 마켓이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4년 미국영화시장이 11월로 옮기면서 밀라노영화시장은 10월로 당겼다가 다음해 폐쇄됐습니다. 미국과 칸이 영화시장을 독점하게 되자 베를린영화제가 종전의 마켓을 유럽필름마켓(EFM)으로 확대해 경쟁대열에 가담했고, 토론토영화제도 가세했습니다.
아시아권에서는 부산영화제보다 10년 먼저 출범한 도쿄영화제와 20년 먼저 탄생한 홍콩영화제가 부산에 밀리면서 영화시장에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홍콩 무역발전국은 1997년부터 운영해온 필름마켓을 6월에서 3월로 옮겨 홍콩영화제와 통합, 효과를 극대화했습니다. 도쿄는 2004년을 전후해 경제산업성 주도로 음악, 만화, 영화, 게임, 방송, 엔터테인먼트를 통합한 ‘종합마켓’을 창설했습니다.
이처럼 급박하게 돌아가는 주변 상황 속에서 우리만 수수방관할 수는 없었습니다. 1998년 창설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PPP(부산프로모션플랜)와 부산영상위원회의 BIFFCOM(영화촬영마켓)을 통합, 운영한다면 기획과 촬영 그리고 완성된 영화까지 한곳에서 사고파는 ‘토털마켓’이 형성돼 전망이 밝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아시아필름마켓이 탄생한 것입니다.
아시아영화펀드
2003년 영산대학교와 제휴해 만든 다큐멘터리영화 제작지원 ‘영산펀드’를 2005년부터 ‘AND펀드’로 확대하고, 2007년 인큐베이팅(시나리오 개발) 펀드와 후반작업지원펀드를 추가해 ‘아시아영화펀드’(ACF)를 출범시켰습니다.
2003∼2011년 다큐멘터리 82편의 사전제작을 지원했고, 그렇게 완성된 작품 중 ‘택시 블루스’(2005·최하동하)와 ‘소리아이’(2006·백연아)는 뉴욕 시라큐스영화제 최우수아시아영화상, ‘야스쿠니신사’(2006·중국 리잉)는 야마카타다큐멘터리영화제와 홍콩영화제 대상, ‘멘탈’(2008·일본 소다 가즈히로)은 부산, 두바이, 홍콩영화제 대상을 받았습니다.
인큐베이팅 펀드는 지난 4년간 30편의 시나리오 개발을 지원했습니다. 지원 작품 중 필리핀 브리얀테 멘도자 감독의 ‘세르비스’는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또 한국영화 9편을 포함해 후반작업지원을 받은 영화 22편은 부산에서 처음 상영된 뒤 세계 영화제를 순방하며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대표적 사례가 2007년에 지원받은 ‘원더풀 타운’과 2008년의 ‘똥파리’입니다.
태국 아딧야 아사랏 감독의 ‘원더풀 타운’은 부산의 뉴커런츠상, 로테르담의 타이거상 등 20여개 상을 받았습니다.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는 로테르담 타이거상을 시작으로 라스팔마스에서 남녀주연상, 도빌에서 대상과 심사위원상, 도쿄필름엑스와 태평양영화제에서 대상을 받는 등 40여개 영화제에서 30여개 상을 휩쓸었습니다.
일본의 대표 영화잡지 ‘기네마 준보’는 2010년 개봉영화 중 ‘똥파리’를 최고의 외국영화로 선정해 최우수외국영화상과 외국영화감독상을 수여했습니다. 기네마준보 역사상 한국영화가 수상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2년 전 양익준 감독, 배우 김꽃비와 함께 로테르담, 라스팔마스, 도빌영화제를 순방하며 그의 수상을 지켜봤던 저는 무한한 감동과 긍지를 갖게 됐습니다.
10주년을 전후해 출범한 아시아영화아카데미, 아시아필름마켓, 아시아영화펀드는 1998년 창설한 PPP와 함께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도약하는 확고한 기틀을 마련해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