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떠있는 200일 해저서 역사를 건진다

입력 2011-04-28 18:10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국내 유일 수중 발굴·탐사팀

크르릉, 크릉, 크크크…. 18t급 선박의 엔진이 몇 차례 뒤척이더니 사위가 고요해졌다. 지난 21일 오전 11시 전북 군산시 연도 앞바다. 정오로 향하는 햇살은 기세가 좋았다. 바다에도 봄은 왔다. 얼굴을 치는 해풍은 찬데 겨울 파카 안쪽에 살짝, 땀이 뱄다.

정박한 뱃전에 투명한 바닷물이 찰랑댔다. 남쪽에서 청수(淸水)가 흘러 일대는 전날 지나온 전남 신안군 송도 바다보다 맑다고 했다. 맑고 조용한 바다라. 징조가 좋았다.

“물이 깨끗하고 잔잔해 보여요. 오늘은 시야가 나오겠어요.”

30년 경력의 잠수사가 콧방귀를 뀌었다. “봄에 신안은 흙탕물잉께 거보단 낫다는 말이제. 모른다고. 일단 들가봐야지. 물도 아직 싸다(조류가 세다).”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금방 알게 될 터였다.

보물 사냥하는 공무원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유물탐사선은 오전 8시30분 4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연도의 주거지를 돌아 해안에서 500m쯤 떨어진 바다위에 멈춰 섰다. 수심 10여m의 얕은 바다가 30m 깊이로 곤두박질치는 물고랑. 시각과 청각이 지워지고 촉각만이 살아나는 원시의 공간. 그곳에서 탐사대는 서류 한 장으로 남은 30년 전의 흔적을 더듬어 찾아야 했다.

국내에서 수중발굴을 허가받은 기관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유일하다. 유물의 존재 여부만 확인하는 ‘탐사’ 기관은 3∼4곳이지만 유물을 실제 수습하는 ‘발굴’은 국립이란 수식이 붙은 이곳 연구소의 고유 권한이다. 매년 4월, 그해 첫 수중탐사가 이뤄진다. 11월에는 하반기 탐사가, 5∼10월에는 이미 유물이 나온 지역에서 발굴을 한다. 한번 떠나면 10일은 기본. 1년 중 200일은 바다에 떠 있다. 어부보다 더 어부를 닮은 삶이다.

양순석(39) 연구사와 홍광희(35) 연구원, 잠수사 강대흔(52)·주용삼(43)씨, 선장 김승삼(50)·박금수(48)씨. 6인의 탐사대가 탄 배는 지난 20일 오전 7시55분 전남 목포시 해양문화재연구소 앞바다에서 출발했다.

11박12일간 송도·연도를 찍고, 원산도(충남 보령시)에서 마무리되는 일정. 탐사는 어부 제보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뭔가 찾아낸다면 해역은 사적지로 지정되고 본격적인 발굴이 이뤄질 것이다. 만약, 뭔가를 찾아낸다면 말이다.

기다리는 자가 보물을 만나리

바닷속에서는 물때가 생명이다. 그래서 탐사의 9할은 기다림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물이 길을 열면 재빨리 움직여야 한다. 21일 오전 11시. 뱃머리를 연도로 향한 채 물고랑에 정박한 배 위가 부산해졌다. 들어오고 나가는 바닷물이 잠깐 멈추는 정조(停潮)가 오전 11시50분. 정조 전후 1시간은 잠수사의 골든타임이었다.

홍광희, 주용삼씨 2인이 한 조로 작업하기로 했다. 겨울용 잠수복 드라이수트를 입고, 수경 장갑 모자를 쓰고, 머리에 랜턴, 왼팔에 다이브컴퓨터, 허리에는 30㎏짜리 납벨트를 찼다. 1.2m 길이 탐침봉과 망태를 챙기고, 마지막에 긴 고무관이 달린 레귤레이터를 입에 물었다. 이물의 공기통에 연결된 생명줄이다.

풍덩! 잠수사가 뛰어들었다. 오전 11시33분. 눈 깜짝할 사이 100여m 고무관이 고물 뒤로 길게 빠졌다. 조류가 세서 잠수사가 뒤로 밀린다는 뜻이다. “물살이 세면 배에서 내려준 하강줄 잡고도 몸이 일(一)자가 된다”는 게 이런 상황이다. “물이 싸다”던 잠수사 걱정이 그제야 이해가 됐다. 15분 뒤 고무관이 U자로 꺾이며 뽀글뽀글, 잠수사가 내뿜는 공기방울이 배를 향해 다가왔다. 올라온다는 신호였다.

“시야가 50㎝도 안 나와. 아무 것도 안 보여요.”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마자 레귤레이터를 빼낸 홍 연구원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이틀 연속 허탕이었다. 오후 2시10분. 철수가 결정됐다. “암만 기다려봐야 소용없제.” 바다위에서 우물대는 건 무의미했다. 안 보이면 나오고, 없으면 퇴각했다.

팀 내에서 ‘대장’으로 불리는 양순석 연구사는 “애초 확인 가능성이 높은 제보는 아니었다”고 했다. 이모씨 등 어부 4명이 ‘연도 ○○쪽 500m 해상’에서 각각 1점씩 4점의 도자기를 신고한 건 1983∼84년. 거의 30년 전이다. 제보자는 마을을 떴고, 그때 일을 아는 이는 없었다. 너무 오래 전 제보인데다 저인망어선 조업지역이어서 뭔가 있었다면 벌써 파손됐을 것이다.

위치도 모호했다.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도 없던 시절, 어부들에게 500m란 숫자는 제법 정밀한 정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탐사대에게 좌표도 없는 500m는 절망적인 숫자다. 수심 30m에서 잠수사에게 허락된 시간은 15분. 제 손바닥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15분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놀라울 만큼 적었다.

서해, 도굴꾼의 블루오션

1976년 1월, 신안 어부의 그물에 중국 청자가 걸렸다. 이후 1984년까지 8년에 걸쳐 14세기 중국 목선 한 척과 유물 2만2000여점이 물위로 올라왔다. 신안 유물은 질과 양에서 고고학자의 가장 화려한 상상마저 초월했다. 배 바닥에서 28t의 동전이 쏟아졌고, 송(宋)·원(元)대 도자기와 고려청자, 목간, 목재, 한약재까지 나왔다.

주거지나 무덤터에서 수습할 수 있는 도자기는 많아야 수십 점. 그나마 깨지고 부서져 완형(完形)은 드물었다. 신안에서는 수천 점의 도자기가 선적된 모양 그대로 포개진 채 발견됐다. 땅에서는 시간이 켜켜이 쌓인다. 수중에서 시대는 통째로 수장된다. 그건 신천지였다.

“고고학에는 정답이 없어요. 도자기 편년은 학자 따라 60∼100년까지 차이나요. 근데 수중발굴 덕에 목간(木簡) 한 점으로 도자기 연대를 거의 정확하게 확정해버리는 거죠. 고고학에서 절대 연대를 말할 수 있게 된 거예요. 굉장한 거죠.”(양순석 대장) 해저에 묻힌 건 어쩌면 고고학의 미래일 수도 있다.

보고는 화물선 항로였던 서해였다. 고려와 조선시대 물자는 개성과 한양을 향해 흘렀고 서해안에는 조세창이 몰려 있었다. 서해의 유물보전 조건은 최적이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개흙이 유물을 진공 포장하듯 보존해줬다. 드물게 난파하고 많이 썩었다고 해도 남은 건 많았다. 수중발굴 역사가 일천한 우리나라가 벌써 17건의 수중발굴을 소화해낼 수 있었던 이유. 이런 천혜의 환경 덕이었다.

호조건은 도굴꾼도 불러들였다. 육지에서 도굴은 사양산업이다. 손 타지 않은 무덤도, 값 나가는 부장품도 드물었다. 바다는 미개척지였다. 투자와 기술이 필요했지만, 그만큼 수확도 컸다.

“도굴꾼 수를 알 수는 없지만 엄청날 거예요. 일단 나오는 (유물의) 수량이 달라서 한 번 찾으면 대를 이어 하나씩 꺼내 팔 수 있거든요. 좌우 10m 면적에서 수천, 수만 점이 나오니까. 도굴꾼이 없을 수가 없는 거죠. 육상도굴하다 해상으로 전업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도굴계의 떠오르는 블루오션이랄까.” 양 대장이 웃었다.

수중고고학자로 산다는 것

고고학과 잠수는 수중고고학의 두 축이다. 고고학에 무지한 잠수사도, 잠수를 못하는 고고학자도 수중고고학자는 될 수 없다. 둘 중 무엇이 먼저냐고 묻는다면? 홍광희씨는 “잠수”라고 단언했다. 홍씨가 스킨스쿠버 강사 자격증을 가진 공대생 출신에, 이제 막 고고학을 배우는 석사 과정 학생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고고학을 배울 때는 ‘수준’의 문제다. 고고학을 잘 알거나, 어설프게 알거나. 그러나 고고학자가 잠수를 배울 때 결과는 두 가지다. 잠수를 할 수 있거나 못하거나. 수중고고학이 요구하는 지식도 육상과는 달랐다. 생사를 가르는 해저에서 발굴을 하려면, 해양학과 해양물리학, 기계공학, 생리학, 의학까지 거들어야 한다.

‘수중고고학은 육상과 다르다’는 주장에 인상 쓰는 이들이 없는 건 아니다. 엄격한 고고학자들은 수중발굴에도 정교한 매뉴얼을 요구한다. 촬영하고 실측하고 바둑무늬 그리드를 짜고 발굴하는 모든 과정은 바다에서도 땅위와 마찬가지로 정확히 이뤄져야 한다. 수중발굴 전문가들은 내심 ‘불가능한 요구’라고 생각한다. 바다는 땅이 아니었고, 변수는 너무 많았다. ‘정확한’ 발굴만큼이나 손실을 줄이는 ‘빠른’ 발굴이 중요했다. 양 대장은 “가능한 한 육상발굴에 가깝게, 정확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도 동일한 방식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76년 신안은 출발이었다. 하지만 그때를 한국 수중고고학의 원년이라 하기는 어렵다. 꽤 오랫동안 발굴 실무는 해군 심해잠수부가 담당했다. 연구자는 배 위에서 발굴을 지휘하고 유물을 수습하는 역할만 했다. 고고학에서 현장의 정보는 유물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 ‘대리발굴’은 정도가 아니었다.

연구자가 잠수를 배워 직접 바다에 뛰어든 건 2002년. 국내 수중고고학의 실제 나이는 10살 남짓인 셈이다. 11년차 양순석 대장의 경력과 똑같다. 현재 잠수가 가능한 연구자는 7∼8명 정도. 그간 지원자는 많았지만 ‘80%는 힘들어서, 20%는 잠수 못해’ 도망갔다. 양 대장이 말했다.

“힘든 일이에요. 바다에 들어가는 건 매일, 매순간 위험과 만나는 일이죠. 길을 잃고 공기가 떨어지는 돌발 상황은 언제든 일어나요. 잠수수당이 월 5만원인데, 목숨값이라고 보면 됩니다. 싸죠?(웃음). 그래도 시야가 나오는 날, 심해에 깔린 비취빛 고려청자 수천 점을 바라본다고 상상해보세요. 힘들고 위험한 날들 가운데 어쩌다 그런 날을 만나는 겁니다.”

군산=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