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 사역 25년만의 귀국 이영민·김명숙 선교사 부부… 아내가 아픕니다 많이 미안합니다

입력 2011-04-27 17:41


‘아내 김명숙(47)은 목사 딸로 유아교육과 성악을 전공해서 에콰도르 수도 키토의 산동네에서 음악사역과 어린이 사역을 했습니다. 3년간 에콰도르 한글학교 교감을 지냈고, 현지인 교회 반주자와 찬양 인도자도 길러냈습니다. 25년간 아내로서, 엄마로서, 선교사로서 리더십을 탁월하게 발휘해 왔습니다. 그리고 손맛이 탁월해서 ‘대장금’이 별명인 아내. 그 아내가 지금 아픕니다.’

25년 만의 귀국

지난 8일 밤 이영민(49) 김명숙 선교사 부부는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결혼한 지 25년, 한국을 떠난 지도 25년 만이다. 아내 김씨는 6년째 당뇨로 투병 중이다. 2년7개월 전부터 상태는 급격히 악화됐다. 세 차례 다리 수술, 피부 이식, 뇌졸중, 콩팥 및 간 기능 저하 등 당뇨 합병증은 무서운 속도로 그녀의 몸을 파고들었다. 한국행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선교사가 먼저예요, 아내하고 사는 게 먼저예요. 아내하고 사는 게 먼저예요.”

12일 아내를 서울 도곡동 양재최의원에 입원시킨 뒤부터 그는 선교사가 아닌 남편으로 돌아왔다.

에콰도르에선 아내와 주로 떨어져 지냈다. 그의 사역지는 아마존 정글인 데다 선교동원가가 되고부터는 선교지를 개척하러 동역자를 찾으러 전역을 누벼야 하는 통에 아내와 함께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지난 10년이 그랬어요.”

아내에게 미안하다. 첫 안식년 기간만큼은 아내의 치유에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내의 재발견

“참 재주가 많은 여자였어요. 음식 잘하고. 선교사 연합회도 아내가 주변에 있는 선교사 몇 가정과 밥 먹다 생겨났죠. 워낙 누구한테 해주는 걸 좋아해서. 아내는 정말 무섭게 일했어요. 워낙 완벽한 사람이고. 성격도 좋고. 그러니까 그게 얼마나 힘든 거겠어요. 나처럼 널널한 사람하곤 다른 거죠. 나는 운동을 해도 일주일에 30분씩 세 번하자 이러면 잘 못해요. 난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으면 그냥 하다가도 내려놓고. 우리 집사람은 하면 무섭게 하는 사람. 철저해요. 자신한테는 아주 철저해요. 남한테는 관대하면서도요”

무섭게 하는 것이 병조차 무섭게 참아내는 것임을 그는 몰랐다.

“병도 그 아픈 걸 잘도 참아냈죠. 하지만 아내의 흐느낌이라든가, 아내가 기도하는 모습을 아내 모르게 보게 될 때…. 아내가 잘살아 준 거에 대해 고마움이 많아요. 누가 그런 얘기를 하대요. 한 남자는 일생을 살면서 여러 여자하고 산대요. 나이가 들어가고 환경이 바뀌고 중년이 되면 그 여자는 결혼할 때 그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공감이 가요. 결혼하고 잘살아 줄 때 그 아내이기만 바라는 건 지극히 내 중심적인 거고. 아내는 그만큼 달렸으니까 쉬어야 되는데 쉬지 못했고 그 대가도 못받고. 지금 저는 아무것도 안하고 아내 옆에 있는 것 자체가 행복해요. 왜 내 안에 행복이 있느냐 하면 난 원 없이 달려와서, 그냥 아내 옆에서 좀 있어 줘야 될 거 같고, 아내를 다시 발견하고 싶고.”

그의 아내는 사실 한국에 나오기 전까지 집중적인 치료를 한 번도 받지 못했다. 해발 2900m 고지대에 살면서 적극적으로 병을 고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경비며, 시간이며, 여건이며 녹록지 않은 게 선교사의 삶이기도 했다.

한국에서의 치료는 현재까지는 순조롭다. 두 배 세 배 부풀어 있던 발은 원래 크기로 돌아왔고, 발바닥에서 멈추지 않고 흐르던 피도 잦아들었다. 병원 관계자는 “콩팥에서 물이 나오고 간 기능도 나빠져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병세가 빠르게 호전되고 있어 희망적이다”고 김씨의 상태를 설명했다.

비용 문제도 해결됐다. “(병원 측) 선교사님이 미리 다 내셨더라고요. 깜짝 놀라서 저희가 말씀드렸죠.” 어느 누구에게도 폐 끼치고 싶지 않아 마이너스통장을 개설했던 이씨였다. 병원은 선교사에게만 혜택이 있다며 선교사를 설득해 입원비를 받지 않기로 했다. 병원엔 선교회가 있었다.

회상

아내와 온전히 시간을 함께하다 보니 옛 추억도 되살아난다.

총신대 교육학과 2학년생이던 이씨는 경기도 오산제일교회로 엠티를 갔었다. 김씨는 교회 담임목사의 딸로 여고생이었다. 그 뒤로 6년을 알고 지냈는데 만나면 티격태격하였다. “제가 장난기가 많아서 만나면 싸웠죠.”(웃음)

그러던 어느 날 김씨가 여자로 보였다. 김씨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장례식장에서였다. “3일 금식하러 오산리기도원에 갔어요. 하나님이 너 그 여자 사랑하느냐 그 여자 위해 희생할 수 있느냐 물으시더군요. 기도하는데 51%밖에 없다고 대답이 나왔어요. ‘51%면 응답이다. 그래 결혼하자.’”

스물넷에 청혼해 스물다섯에 식을 올렸다.

“우리 집사람이 하는 얘긴데. 저는 유일하게 순수했던 남자랍니다. 아무 생각 없는 남자. 다른 남자들은 자기가 가진 걸 좋아했는데, 예를 들면 피아노학원 원장이니까 목사 딸이니까 그런 주변적인 것들. 저는 그런 게 아니라 여자를 원했거든요.”

3대째 신앙 일가에서 자란 김씨와 성경을 불태워버리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겨우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이씨. 배경이 다르듯 부부는 참 달랐다.

아마존 인디오

“저는 틀에 갇히는 걸 싫어해요. 길들여지는 영성 자체를 원하지 않죠. 제 아내와는 엄청나게 차이가 있죠. 근데 나는 아내 말을 들어요. 90% 이상은. 왜냐면 살아보니까 아내 말이 맞는 게 많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없으면 나는 또 내 길을 가는 거죠.”

중국(당시 중공) 선교사를 꿈꿨던 이씨는 부모님(부친이 에콰도르 사회간접자본(SOC) 건설에 참여) 찾아뵙는다며 에콰도르에 갔다가 엉겁결에 눌러앉았다. 처음 5년간은 안데스 산지에서 아내와 함께 어린이 사역을 했다. 아마존 사역은 그 후부터다.

“나는 아마존에서 어떻게 있었느냐면요. 나무에 걸린 그물 침대에서 자요. 아무것도 안 덮고. 그걸 너무 좋아해요. 모기장도 안 치고 자요. 그게 그냥 좋은 거야. 여기서도 저 밖에 바람이 들고 비가 오면 그걸 맞고 좋아하는 거예요. 나는 아마존 자체를 너무 즐겼어요. 그 안에서 창조의 영성, 십자가, 하나님을 알았죠.”

아마존에 푹 빠진 남자. 희한한 건 체형이며 기질, 삶의 방식 그 모든 것이 인디오와 꼭 같았다.

“아내와 같이 사역은 했지만 아내의 사역은 도시형이었다면 제 사역은 완전히 아마존 선교였어요. 인생의 하프타임을 아마존에서 아내와 함께하려고 했는데 모든 게 다….”

갈림길

아들, 딸이 대학에 들어갔으니 아내와 함께 멋지게 인생2막을 펼치려고 했었다.

“아들은 이번에 연세대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온대요. 딸은 방학하면 온다고 하고요.”

아내 김씨가 처음 말문을 열었다. 병을 앓으면서 부쩍 아들 딸 생각이 나는 김씨. 딸은 미국 시카고 무디성경학교에서 신학과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있고, 아들은 노스팍대학에서 국제 비즈니스를 공부하며 선교적 호텔 경영인이 되길 꿈꾸고 있다. 장학금도 받고 스스로 벌어 공부하는 이 아이들은 엄마 아빠의 닮은꼴이다.

“사실 우리 아이들 죽을 고비도 몇 번씩 넘겼거든요.”

두 살 때 인디오가 준 돼지피를 먹고 사경을 헤매다 살아난 아들 용호(20)는 어디에서도 기죽지 않는 씩씩한 청년으로 자랐고, 물에 빠졌다 살아난 딸 문희(21)는 공부하면서 짬짬이 노숙인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유학생에겐 떡볶이를 해주면서 ‘권사님’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인정 많은 숙녀로 자라줬다.

사랑하는 딸 아들이 한국에 들어오면 가족은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아내의 병으로 인한 모처럼의 일이다.

“나는 아내가 선교 그만하자 그러면 할렐루야 아멘하고 그만둘 수 있어요. 하나님 다음으로 중요한 게 아내니까. 근데 그런 얘기를 안 할 뿐더러 본인이 선교지에서 인생 마치겠다고 결정하니까. 저 상태로도 가겠다고 하니까. 제 입장에선 부담스럽죠. 하지만 우린 어디서 사느냐. 우린 에콰도르죠.”

아내의 병세가 오락가락하듯 남편의 마음도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의 블로그에 적혀 있던 문구 한 줄. ‘기도: 아내를 고쳐주세요.’

글 이경선 기자·사진 김태형 선임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