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글속 세상] 불혹, 색소폰에 혹하다

입력 2011-04-26 21:58


연인 앞에서 능숙하게 악기를 연주하며 사랑을 고백하는 드라마 속의 주인공. 누구나 한번쯤 꿈꾸어본 장면이 아닐까.

베이비붐세대를 중심으로 색소폰이 유행처럼 번지는 배경에도 이런 로망이 있다. 자녀들이 다 커서 여가활용이 가능해진 데다 아직 혈기왕성함에도 불구하고 은퇴시기가 다가오면서 허전한 가슴을 달래줄 문화활동에 관심이 가고 있는 것이다. 악기를 한번도 다뤄본 적이 없는 초보자도 3개월 정도 열심히 익히면 웬만한 애창곡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을 만큼 쉬운데다, 저렴해진 악기가격에 배울 곳이 많이 늘어난 것도 색소폰 인구가 급속도로 확산되는 이유다.

색소폰은 풍부하고 유연한 음색으로 연주자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해 낼 수 있는 매우 감성적인 악기이다. 바이올린 못지않게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도 멋지게 연주할 수 있지만, 배호의 ‘안개낀 장충단공원’이나 임주리의 ‘립스틱 짙게 바르고’도 다른 악기가 흉내낼 수 없는 촉촉한 톤으로 맛깔나게 연주할 수 있는 대중적인 악기라고 할 수 있다. ‘고난의 길(Via Dolorosa)’의 처절한 그 느낌을 전달하는 데도 색소폰만한 악기가 없다.

색소폰은 마우스피스와 리드의 조합에 따라 음색의 대부분이 결정되는데, 부드러운 속삭임도 앙칼진 고음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데다가, 푸근하고 허스키한 서브톤에서부터 때로는 찢어지듯 절규하는 칼톤까지, 다양한 음색과 주법으로 인간의 육성의 한계를 극복해 낸다. 같은 곡이라도 색소폰으로 연주할 때 익히 듣던 가수의 노래와는 색다른 감동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이런 이유인 것이다.

중장년층에서 시작된 색소폰 열풍이 지금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 폭을 넓혀가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색소폰 인구는 30만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국내최대 색소폰 동호인사이트인 ‘색소폰나라’는 회원수만 해도 13만명을 넘어서고, 동네마다 있는 동호회가 전국적으로 1000개가 넘는다.

경기도 일산의 ‘모아색소폰동호회’를 이끌고 있는 이근성(52·건설업)씨는 “동호회는 배움의 목적도 있지만 지역 주민들 간의 친목교류도 무시할 수 없다”며 회원들의 연주력은 물론이고 분위기가 화목한 동호회를 잘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이곳 회원인 세 아이를 둔 주부 양현미(42)씨는 3년 전 남편의 권유와 ‘분위기 있는 남자목소리’ 같은 음색에 매료돼 색소폰을 시작했는데, “틈틈이 연습실을 찾아 신나는 리듬에 맞춰 몇 곡 불고 나면 세상만사 스트레스가 한방에 다 날아가는 기분”이라며 밝게 웃는다. 최성택(65·사업)씨도 처음에는 나이 때문에 망설이다가 더 늦으면 못할 것 같아 용기를 냈다고 하는데, 4년차인 지금은 혼자 즐기는 차원을 넘어섰다. 그는 “호수공원에서 열리는 야외연주회와 요양원 등을 찾아가는 봉사연주회에 참석할 때마다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고 즐거워한다. 이렇듯 색소폰은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도전을 통한 삶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

색소폰은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는 게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프랑스와 일본산 제품들이 고급품 시장을 장악하고 있고, 그 나머지는 주로 국내상표를 단 중국과 대만산 OEM제품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들 10여개의 OEM제품들도 꾸준한 품질관리를 통해 웬만한 고가의 악기에 버금가는 품질을 보여주고 있어 색소폰 인구의 저변을 넓히는 데 한몫하고 있다.

최근에는 해머링공법을 적용한 제품까지 선보여 연주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일일이 수작업으로 바디와 벨부분을 하루 종일 망치질하는 공정상 대량생산이 안 되는 단점은 있지만 울림과 음색이 월등히 좋아진다고 한다.

색소포니스트 강기만(39)씨 같은 경우에는 이 ‘제네시스마스터’ 제품을 사용해 3집까지 음반녹음을 끝낸 상태다. TV프로그램 등을 통해 잘 알려진 대니정(37)도 국내 유명악기사에서 OEM방식으로 출시한 ‘알버트웨버’ 색소폰의 전속모델로 활동하며 실제로 음반제작과 각종 공연에서 이 제품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망설이지 말고 지금 도전해보자. 다음번 아내의 생일에는 명품핸드백보다 장미꽃 한 송이와 멋진 색소폰 연주를 준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사진, 글=윤여홍 선임기자 yhy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