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김종회] 신경숙과 한국문학의 새 길
입력 2011-04-25 17:43
“세계적 보편성을 담보하는 데 부족한 부분은 없는가를 살펴야 한다”
신경숙의 단편 ‘풍금이 있던 자리’에는 본문에 풍금이라는 말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풍금의 이미지가 추억의 자리로 생생하게 살아 있다. 이야기의 줄거리가 훌륭해서가 아니다. 이야기 재료는 나이 든 처녀와 유부남의 사랑이라는 매우 통속적인 것이다.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도입부에서부터 화사한 꽃밭처럼 빛나는 문장의 힘이다. 문학평론가로서 필자는,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신경숙은 소설을 안 썼으면 큰일 났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남는다. 한국어와 그 아기자기한 운용에 익숙한 이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문장이, 외국어로 번역되었을 때는 웅숭깊은 감칠맛을 상당 부분 상실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신경숙에게만 국한되는 사안일 리 없다.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만날 수 있는 청신한 아름다움을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가 잘 감당할 수 있을까. 김훈의 에세이들이 보여주는 미묘한 감정의 떨림 또한 잘 전달될 수 있을까.
이를테면 한국문학의 번역이 충실한 제 몫을 다하기에는 근본적인 취약점이 상존한다는 것인데, 실상 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또 한국어만의 과제도 아니다. 물론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번역 기술 이전에 소설에 담긴 콘텐츠의 문제다. 통속적인 주제라 할지라도 그것이 누구의 손에 걸렸느냐가 작가의 수준을 말한다. 예컨대 대학생과 창부의 사랑이라는 주제가 도스토예프스키에 이르면 ‘죄와 벌’의 서두가 되고, 알렉산드르 뒤마에 이르면 ‘춘희’가 된다.
그 주제가 가진 객관적 보편성 가운데서 그 작가만의 새로운 시야를 열어 보인 까닭에서다. 바로 그 대목에서 신경숙이 미국 발 사고를 쳤다. ‘엄마를 부탁해’의 미국 진출 사건이다. 어머니와 자식 간의 결코 단절할 수 없는 끈끈한 유대, 이 만유 공통성의 법칙을 소설의 바탕에 깐 것이 문화충격을 넘은 감응력의 시발이라는 뜻이다. 그의 어머니는 우리 민족의 어머니이며 우리 민족의 어머니는 세계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정초했다. 이 사건은 우리 문학의 세계화에 산뜻한 푸른 신호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두 가지 요점을 환기한다. 하나는 인류 보편적 소재를 기반으로 삼되 소설적 서사 구조가 다른 작품과 차별화되는 명료한 독창적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를 서술하는 방식과 문장력의 힘인데 한글로 쓴 소설에서 충분히 입증된 강점을 우수한 번역자가 현지 언어문화권에 걸맞도록 잘 옮겨 놓았다는 것이다. 미상불 탁월한 번역이 없이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중심부로 진입할 길을 찾기는 무망한 노릇이다.
한국문학의 노벨문학상 가능성을 타진하는 여러 유형의 논의들도 기실 이 지점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연유로 이미 타계한 훌륭한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는 사업도 중요하지만 현존 작가들의 대중적 수용력이 높은 작품에 자주 눈길을 두는 것이 옳겠다. 신경숙의 소설이 미국에서 번역되는 절차가 결코 간략할 수 없었을 터이나 그 소설이 이미 170만부의 국내 판매 기록을 가졌다는 실상과 무관할 수 없다.
미국 출판 시장에서 해외 작가의 작품이 번역돼 출판되는 비율이 고작 1% 내외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초판 10만부가 출간되고 곧 5쇄를 찍었으며 NYT 베스트셀러에 진입한 성과는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반작용도 만만치 않다. 미국 조지타운대 영문과의 모린 코리건 교수가 공영방송 NPR에서 ‘김치냄새 나는 크리넥스 소설의 싸구려 위안’이라고 혹평한 것이 단적인 예다. 이 심한 독설에 반발하기는 쉬운 일이나, 신경숙 소설이 세계적 보편성을 담보하는 데 부족한 부분이 없는가를 살펴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그 어려운 일이 필요하다. 미국 가족관계의 정서에 있어서 앵글로색슨계 백인에게 우리와 같은 모녀관계의 심도를 기대할 수 없는 측면도 있거니와, 더 중요하게는 이 사건이 작가 신씨의 언술처럼 우리 문학의 이름으로 미국에 내린 ‘첫눈’이기에 그러하다. 그 배경에는 200만명에 이르는 재미 한인들의 후원도 있다. 한국문학의 세계무대 진출을 더욱 활달한 보편성으로, 그리고 보다 개성 있는 창의력으로 밀고 나가야 할 이유다.
김종회(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