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시산방’의 인연, 두 거장의 예술혼… ‘김용준-김환기展’ 4월 27일부터 성북미술관
입력 2011-04-24 17:27
국수필문학의 백미로 평가받는 ‘근원수필’의 저자 김용준(1904∼67)은 중학교 시절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할 정도로 일찍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1931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나온 그는 서화협회 회원전에만 몇 번 참가했을 뿐 화가로서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문이나 잡지에 미술평론과 시론(時論) 등을 기고하면서 간결하고 호방한 필치로 이름을 얻었다.
그는 34년에 소설가 이태준이 늙은 감나무가 있다고 해서 이름 붙인 서울 성북동 노시산방(老枾山房)으로 옮겨 간 후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진로를 바꾸었다. 이후 이태준이 철원으로 가고 없어서 김용준 역시 44년에 노시산방을 팔고 의정부로 들어갔다. 46년에는 서울대 미술학부 동양화과 교수가 되고 6·25전쟁이 터지자 월북해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김용준에게서 노시산방을 물려받은 이는 한국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화가 김환기(1913∼74)였다. 김용준은 ‘육장후기’에서 “수화(김환기의 호)는 예술에 사는 사람이다. 노시산방이란 한 덩어리 환영을 인연 삼아 까부라져 가는 예술심이 살아나고 거기에서 현대가 가질 수 없는 한 사람의 예술가를 얻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일이다”라고 적었다.
김환기는 자신의 호와 부인(김향안)의 이름을 따 수향산방(樹鄕山房)으로 이름을 바꾸고 56년 프랑스 파리로 떠나기 전까지 이곳에서 작업했다. 36년 일본대학 미술과를 졸업한 그는 46∼49년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사실파를 조직, 모더니즘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67년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등 점과 선의 추상화로 명성을 높였다.
김용준은 일본이 한국미술과 전통적인 창작 기법을 말살하던 시절, 고구려 고분벽화 ‘사신도’와 단원 김홍도를 거론하면서 우리 미술을 되찾는 방법론을 제시하는 데 힘썼다. 아홉 살 아래인 김환기는 항아리, 달, 별, 학, 구름, 밤하늘 등 서정적인 소재를 통해 한국의 미를 표현하려고 애썼다. 두 사람의 가는 길은 달랐지만 우리 미술에 대한 열망은 같았던 것이다.
이들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두 예술가를 만나다-근원 김용준·수화 김환기’ 전이 27일부터 6월 26일까지 서울 성북동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열린다. 2009년 개관한 성북구립미술관은 노시산방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이번 전시는 두 예술가의 추억이 깃든 성북동 시절을 중심으로 각각의 그림 10여점, 책 장정과 삽화 인쇄물, 에피소드가 담긴 사료 및 영상을 선보인다.
투명한 예술혼을 담고자 했던 두 사람이 얼마나 허물없이 지내던 사이였는지 김용준이 쓴 ‘키다리 수화 김환기’(주간서울 1949년 10월 17일자)에서 알 수 있다. “수화의 그림이나 글도 필경 싱겁기 짝이 없으려니 했더니 실은 그와는 정반대로 화(畵)와 문(文)은 감각이 예리하고 색채가 풍부하고 범속한 데서 한층 뛰어난 짓을 곧잘 한다.”(02-6925-5011).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