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재희] 주는 만큼 받는 법칙
입력 2011-04-24 17:36
그녀는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한 장애우이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방문상담을 했다. 그녀는 진행성 뇌병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서른 중반의 아가씨로, 작은 임대아파트에 홀로 살고 있었다. 장애우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어 그녀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것도, 말 할 때마다 일그러지는 얼굴과 손발을 보는 것도 어색하고 불편했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예기치 않게 튕겨 나오는 침 파편은 몹시 당황스럽게 했다.
그녀는 자기와 이야기하며 사귐을 가질 수 있는 벗을 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상담자이지 벗은 아니라는 생각에, 별 이슈 없이 그녀와 보내는 시간이 아까웠고, 전문성이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언짢았다. 이런 일은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넉넉히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와의 만남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나는 몇 달째 그녀를 만나고 있다. 그녀와 함께하지 못할 정도로 내가 대단한 존재가 아니며, 무시할 정도로 그녀가 무가치하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그런 유형의 장애우에 대한 편견을 많이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나보다 못한 사람, 생각이 부족한 사람, 공유되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 그저 도움을 받는 존재이지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하거나 교제를 할 수 있는 상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발음은 서툴었지만 표현하는 문장이나 흐름은 수려했다. 그녀는 긍정적이고 진취적이며 똑똑했다. 자신의 삶과 미래를 꿈꾸며 계획도 했고, 자신의 상황과 현실의 높은 벽 앞에서 좌절도 했다. 그녀는 봄을 느끼고 즐길 줄 아는 풍부한 감성도 지녔다. 어제는 화장을 하고 망사 스커트도 차려입고 재활치료를 다녀왔다고 했다. 몸은 비틀려 걸을 수 없지만 예쁘게 치장하고 봄을 즐기고 싶은 마음은 또래의 젊은 아가씨들과 동일했다. 영화에도 관심이 많아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줄리아 로버츠, 니콜라스 케이지 등 어려운 이름도 줄줄이 꿰고 있었다.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사랑도 결혼도 무척 원하고 있는 듯 보였다. 단지 아버지 같은 남자를 만날까봐, 현실적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결혼하려는 사람이 없을까봐, 또 자신과 같은 아이를 낳을까 두려워 좌절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장애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지만 나와 똑같이 희로애락의 감정을 느끼며, 생각하고 꿈꾸고 또 좌절하는 하나님의 형상임을 새롭게 깨달았다.
나는 그녀와 이야기를 하며 잠시 동안의 시간을 함께할 뿐이다. 이것도 돌봄이라면 돌봄일 수 있을까. 그런데 그녀를 돌보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그녀로 하여금 나를 돌보도록 허락하는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를 돌보는 사이, 그녀는 편협하고 교만하며 사랑이 부족한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며, 내가 얼마나 예수님이 필요한 연약한 존재인지 새삼 가르쳐 주고 있었다.
김재희(심리상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