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스스로 근대 동아시아를 묻다… ‘다시 보는 동아시아 근대사’
입력 2011-04-21 21:24
다시 보는 동아시아 근대사/미타니 히로시 외/까치
“많은 일본인들은 과거에 동포가 이웃나라 국민들에게 전쟁을 도발하여 그들을 지배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도 믿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에 들어가면 일본인의 지식은 애매모호하며, 학교에서 일본의 침략과 지배에 대해서 상세히 배우는 이웃나라 국민들의 수준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근대에 동아시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일본인 학자들(도쿄대 대학원 전현직 교수 3명)이 쓴 ‘다시 보는 동아시아 근대사’(까치)의 문제의식은 서문에 적힌 위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은 일본사의 테두리에 갇혀 있지 않고, 철저히 동아시아사의 관점에서 서술됐다.
책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건 1894년 청일전쟁 시기까지다. 19세기 후반은 청이 아편전쟁과 서태후의 섭정을 겪고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300년 만의 정권 교체를 이룩했으며 한 발 늦은 조선이 근대 속으로의 첫발을 떼던 시기다. ‘근대 태동기’라 할 만한 17∼18세기 상황, 비슷한 길을 걷는 듯 보였던 한·중·일 삼국의 미세한 차이도 조명했다.
청은 수많은 서양인들을 접했으면서도 조공체제의 틀에 안주했고, 조선은 강력한 군주 아래 발전하는 듯 보였으나 사실은 성리학에 매몰돼 있었다고 밝힌다. 일본은 지방 영주와 난학(蘭學)의 존재가 근대화의 밑거름이 됐다고 서술했다.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쓰여졌으나 기본적으로 일본인 학자가 쓴, 일본인의 시야에서 보는 동아시아사다. 지나치게 건조한 서술이 오히려 눈에 거슬리는 측면도 있으나 감안하고 읽다 보면 몰랐던 사실이 눈에 띈다. 조선의 첫 근대 조약이었던 강화도조약(1876)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살펴보자. 유신으로 정권교체를 이룬 직후 일본은 조선과 화친조약을 맺기 위해 대마도를 통해 서계(書契·조선시대 일본인의 입국사증을 겸했던 외교문서)를 보냈다. 이 때 서계에서 자신들의 왕을 ‘황상(皇上)’이라는 표현한 게 문제가 됐다.
스스로를 ‘대군(大君)’이라 칭했던 쇼군 정부와는 달리, 메이지 정권은 조선과 중국 간 책봉 관계를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조선에 대한 우위를 확립하기 위해 스스로를 ‘황제국’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조선이 이 표현에 반발해 화친조약을 맺지 않고 버티자 일본 내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됐다. 그러나 오쿠보 도시미치 내각은 러시아와 중국의 반응을 우려해 ‘평화적으로’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물론 군사적 도발과 사신의 오만한 행동 등이 수반된 조약체결이었다.
우리의 근대사 서술에서는 중국과 일본이 강조되고 청일전쟁 후 러시아가 전면에 등장한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사에서 최대의 가상 적국은 러시아와 미국이었다.
일본은 러시아를 의식해 한국 침략의 꿈을 (일시적으로) 접어야 했고, 결국엔 전쟁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1853년 흑선내항을 통해 유신으로 가는 길을 열었던 미국 역시 태평양전쟁이라는 악연으로 이어졌다. 한국 근대사와 밀접하되 잊혀지기 쉬운 러시아, 미국, 영국의 동향이 보다 입체적으로 서술됐다.
예상 불가능하고 대처가 어려웠다는 점에서, 근대는 전근대를 살던 모두에게 천재지변과도 같았다. 그럼에도 성공과 실패는 확연히 엇갈렸다. 저자 중 한 사람인 미타니 히로시는 말한다.
“자원과 환경 제약이라는 문제는 확실히 찾아올 것이라고 예상되지만, 그것이 언제 인류를 재앙으로 몰고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간의 일생을 뛰어넘는 장기적인 문제를 과연 인간이 진지하게 사고할 수 있을까? (중략)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제쳐두고, 훨씬 전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세기 일본에는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준비가 있었으며, 그로 인해서 서양과의 위기를 회피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