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예배로 세족식하는 세브란스병원에 가보니
입력 2011-04-21 17:24
[미션라이프] 흰색 대야를 사이에 놓고 의사와 환자가 앉았다. 의사는 무릎을 꿇었고, 환자는 의사의 눈을 조용히 응시했다.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했다. 사랑과 섬김, 간절함의 눈길이 오갔다.
대야에는 물이 절반쯤 차 있었다. 환자들의 발을 씻길 물이었다. 이윽고 환자들은 신고 있던 슬리퍼와 양말을 벗었다. 하얀 발이 드러났다. 핏기 없는 창백한 발이었다. 휠체어에 앉아 링거 주사를 팔에 꽂은 채 앉아 있던 김태호(37)씨의 발 역시 희었다. 190㎝나 되는 키처럼 그의 큰 발은 퉁퉁 부어 있었다. 발만 보아도 그의 상태를 헤아릴 수 있었다.
안신기 세브란스 의료선교센터소장은 두 손으로 김씨의 왼쪽 발을 천천히 끌어당겨 대야 속으로 가져갔다. 발 전체를 감싸며 씻기 시작했다. 그의 병을 씻겨주려는 듯 정성스레 닦아냈다. 그리곤 기도했다. “태호씨를 사랑하시는 주님,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소서. 붙잡아 주소서….”
순간 김씨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흐흐흑.” 안 소장도 눈앞이 흐려졌다. 이번엔 오른발을 대야 속으로 가져갔다. 김씨는 악성 뇌종양으로 몇 차례 대수술을 받았다. 가족도 없이 혼자 병마와 싸웠다. 부산에서 서울을 몇 차례나 오갔다. 그의 발은 고난 여정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듯 보였다. 그 발이 물에 닿았고 사랑의 손길에 감응했다.
21일 서울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예배실에서 ‘세족 예식’이 열렸다. 환자도 울고 의사도 울고 가족도 울었다. 2000년 전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의 심정을 담아 10여 년 전부터 고난주간에 실시하고 있는 예배다.
이날 예식엔 환자와 가족, 의료진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환자들은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고 링거를 몸에 달고 참석한 환자도 13명이나 됐다. 자신들의 발이 씻겨지자 하나같이 눈물을 흘렸다. 어린이 환자를 안고 있던 어머니들은 마구 흐느꼈다. 의사들은 환자의 이름과 병명, 상태 등을 확인하며 기도했다.
세족 환자 중엔 기독교공동체 예수원 설립자 고 대천덕 신부의 부인 현재인(91) 사모도 보였다. 첫째 딸인 얀시씨와 동행한 현 사모는 발 염증의 일종인 봉화직염에 걸려 한 달 전 수술을 받고 입원중이었다.
김동수 어린이병원장, 조규성 치과대학병원장, 이수진 노조위원장 등 9명이 직접 예식에 참여해 40여명 환자들의 발을 씻었다. 지난주 심장수술을 받았다는 염모씨는 예배 드리러 왔다가 감동을 받아 즉석에서 세족을 신청했다. 박영환 제2진료부원장은 염씨의 젖은 발을 수건으로 닦아주며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