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좀 하자는 여자… 무명 미술가 위한 전시회 ‘A컴퍼니’ 정지연

입력 2011-04-21 17:56


정지연(34)씨가 ‘미술업계’에서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전산학과를 나왔기 때문이다. 미술계 인맥이 제로라는 사실, 이 일에는 최적의 조건이 됐다. IT 분야의 작은 컨설팅 회사에 다니던 2007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술시장이 가파르게 성장한다는 보도가 잇따르자, “우리도 구글처럼” 쿨한 비즈니스 좀 해보자며 젊은 이사님이 미술 관련 사업 아이템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그 회사에서 미술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그녀였다. 대학 3학년 때 ‘교양미술’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전시회 다니는 게 일이 됐다. 그림 경매에도 가보고, 세련된 컬렉터들도 만났다. 유명 작가의 개인전 오프닝 파티에선 누구나 ‘선생님’이다. 참석자는 그림을 사줄지도 모르는 잠재적 고객이므로. 교양미술 숙제하러 처음 전시회에 가면서 ‘혼자 가도 되나…’ 고민했던 과거를 그들은 눈치 채지 못했다. ‘정 선생님’으로 불리는 것,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화려한 시장조사’를 하다가 서울 군자동의 어느 서양화가 아틀리에를 방문했다. 4층 상가 건물의 한 구석. 그 좁은 공간에 칸막이를 해서 선배 작가와 나눠 쓰고 있었다. 캔버스, 의자, 야전침대가 전부여서 마주 앉아 얘기하려니 한 사람은 사과상자에 앉아야 했다. 그는 여기서 먹고 자며 예술을 한다. 미술가들은 응원이 필요하구나, 그녀가 찾은 사업 아이템이다.

구글처럼 하고 싶었던 그 회사는 구글이 아니었다. 예술가들을 응원하자는 ‘쿨한 비즈니스’는 투자자들에게 내놓기 머쓱해 보류됐다. 2008년 7월 정씨는 인터넷 카페를 개설했다. ‘아티스트 팬클럽’. 돈 없는 무명의 젊은 미술가들에게 작은 전시회를 열어주자고 했다. 방송 출연 어려워진 그룹 JYJ를 위해 인터넷 방송국을 차려버린 아이돌 팬클럽처럼은 못하더라도.

-예술가는 가난하니까 팬들이 후원하자. 그런 건가요?

“갤러리와 신진작가, 그 갑을관계의 ‘을’을 응원하자는 거죠. 작가가 돈 받고 갤러리에 전시하는 게 아니에요. 전시 자체가 너무 영광스런 일이어서 작품운반비, 도록용 사진 촬영비, 다 작가가 부담해요. 그림 팔리면 갤러리와 5대 5로 나누고, 안 팔리면 한두 작품을 갤러리에 기증해야 하고요.”

-그럼 작가들이 반발하지 않나요?

“어떤 젊은 화가가 갤러리와 문제가 생겨서 말다툼하다 ‘너, 어느 교수한테 배웠어?’ 하는 얘기를 들었대요. 미술계 정보가 모이는 사이트에다 갤러리 이름 거명하면서 ‘공개사과 바랍니다’란 글을 올렸어요. 화가를 옹호하는 댓글은 하나도 안 달렸고, ‘쟤 어쩌려고 여기다 이런 걸 썼지?’ ‘쟨 이제 끝났다’ 하는 분위기였죠. 일주일 뒤 오히려 그 화가가 사과문을 올렸어요.”

-미술계도 좁은 동네인 모양이군요.

“저도 만약 미술 전공했다면 이런 일 못했을지 몰라요.”

그녀가 카페에서 처음 한 일은 미술가들을 인터뷰해 소개하는 거였다. 세상에 알려주는 게 당시 할 수 있던 응원이었다. 예술 사랑하는 30대 여성을 불도저 같다고 묘사하는 건 상당히 어색한 일인데, 그녀는 그렇다. 몇 달 계속하다 인터뷰로는 성에 안 차 회사를 그만뒀다고 한다.

지난해 봄, 본격적인 ‘팬클럽’ 활동을 위해 카페 회원 중 큐레이터 등 운영진 5명을 모집했다. 목표는 전시회를 여는 것이다. 보통 미술 전시회는 최소 일주일 이상 한다. 이들이 준비한 건 2시간30분짜리 ‘반짝쇼’였다. 전시회 이름도 ‘반짝쇼’다.

먼저 작가 모집. 이건 쉬웠다. 전시할 곳을 찾는 젊은 작가는 많다. 그게 이 팬클럽의 존재 이유니까. 미술계는 ‘네오룩’으로 통한다. 작가도, 갤러리도, 미술학원도, 미술품 운반업체도 네오룩닷컴 게시판에서 소식을 올리고 정보를 찾는다. 여기서 공모하니 10명 모집에 20명이 신청했다. 이들과 계약서를 썼다(갤러리와 신진작가 사이엔 구두계약이 관행인데, 작가의 권리를 찾자면 계약서 쓰는 습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림이 팔리면 3대 7로 나누기로 했다. 작가가 7이다.

다음은 대관. 전시관 구하려고 여기저기 전화하다 “팬클럽에는 안 빌려준다”는 얘기도 들었다. 대관은 기본이 일주일인데, 2시간30분만 빌리자니까 다들 웃는다. 서울 구로동 구로아트밸리 담당자를 열심히 설득해서 26만원에 계약했다.

지난해 7월 2일. 오후 7시30분부터 10시까지 진행된 1회 반짝쇼는 콘서트에 가까웠다. 작가 10명이 자기 작품 앞에서 뭘 그렸는지, 왜 그렸는지 설명하고, 샌드위치 먹으며 관람객과 수다를 떨었다. 인디밴드 초청해 노래를 들었고, 관람객들이 작가 이름 기억하게 아주 쉬운 퀴즈를 내서 상품도 줬다.

60평 전시관에 70명이 다녀갔다. 입장료 1만원씩 낸 사람들이다. 입장료 받지 말자는 운영진도 있었지만 정씨가 1만원 받자고 우겼다. 돈을 내야 진지하게 작품을 즐긴다는 명분으로(전시회 준비에 200만원쯤 들었는데 상당 부분 정씨 사비였다). 그리고 20만원짜리 소품 두 점이 팔렸다. 이걸 사간 사람은 “아티스트 팬클럽의 팬클럽”이라고 했다.

-반짝쇼는 계속되고 있나요?

“지난해 12월에 2회 반짝쇼를 했어요. 이틀간 150명쯤 왔죠. 그때 오셨던 이태원의 ‘갤러리골목’ 대표가 파격적인 조건에 대관해 주셨어요. 갤러리골목에서 4월 27일부터 5월 22일까지 홍수정 장수지 이지영 작가의 개인전을 차례로 합니다.”

-어떤 작가들이죠?

“전시회 이름이 ‘나의 첫 전시회’예요. 생애 첫 개인전을 하는 분들이죠. 공모했는데 작가 40명이 신청해서 공개심사위원단 꾸리고 작가들 작업실 찾아가 일일이 인터뷰해서 뽑았어요.”

그녀는 아티스트 팬클럽을 토대로 ‘A컴퍼니’란 회사를 차렸다. 서울시 강북청년창업센터에 입주해 있다. 매출? 첫 반짝쇼에서 팔린 그림 2개 값의 30%가 아직은 전부다. 회사 다니며 모아둔 돈으로 버틴다. 그래도 하는 일이 많다.

일산의 카페 터치아프리카 벽면과 메뉴판 뒷면에 이승아 작가, 홍대 앞 가방가게 비아모노 매장 한켠에 정치구 작가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버스를 갤러리로 개조해 관람객 찾아다니는 ‘버스뮤지엄’, 비싼 그림 사기가 망설여지는 이들에게 그림을 빌려주는 ‘작품임대’ 프로젝트도 추진 중이다.

아티스트 팬클럽은 회원이 2000명쯤 된다. 그중엔 갤러리 관계자들도 많다고 한다.

“얘네 뭐지? 하면서 지켜보시는 거죠. 그런데 저는 미술계 일원이란 생각, 안 해요. 갤러리들과 경쟁할 생각도, 실력도 없어요. 일종의 사회적 기업을 하는 거예요. 갤러리들이 챙기지 못하는 무명작가들 응원하는. 한 가닥 욕심은 이왕이면 좋은 작품 소개하자는 거고요.”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