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반만 먹자는 여자… 일상 속 기부 ‘1/2 프로젝트’ 박지원

입력 2011-04-21 17:57


편의점 냉장고에 생수 2병이 진열돼 있다고 치자. 같은 브랜드 제품이고 내용물도 같다. 하나는 500㎖, 다른 하나는 250㎖. 값은 둘 다 1000원이다. 당신은 어느 병을 집어 들겠나?

당연하다. 바보가 아니라면 500㎖ 병을 집어야 한다. 그게 훨씬 싸니까. 그런데 박지원(26)씨가 하는 일은 사람들이 이 상황에서 250㎖ 생수병을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다. 소비자를 ‘바보’ 만들겠다는 프로젝트, 2009년 1월 설 연휴에 시작됐다.

카이스트 산업디자인과 4학년이던 김성준(26)씨가 놀러 와서 이런 얘기를 했다. “생수를 한 병 사면 다 마시지 않고 버릴 때가 많잖아. 들고 다니자니 가방이 무겁고. 병에 물을 반만 담아 팔면 어떨까? 값은 한 병치 받아서 절반은 자동으로 기부되게 하고.”

둘은 디자인 전공 학생들을 지원하는 삼성전자의 후원 프로그램에서 알게 됐다. 이화여대 시각디자인과 졸업을 앞두고 있던 박씨는 이렇게 답했다. “아예 생수병을 반 잘라서 반쪽짜리로 만들면 어때? 그러면 먹던 물 같지 않고 생산 원가도 줄어들고 관심도 끌겠네.”

두 디자이너가 만든 물병(작은 사진)에는 이런 생각이 담겨 있다. 1년에 한번 10만원 기부하라? 나라면 망설이겠다. 가끔 물 살 때 500원 기부하라면? 그 정도야 뭐. 저런 물병 들면 뭔가 있어 보이잖아? 큰 맘 먹고 하던 기부를 일상에서 습관처럼 할 수 있게 그 ‘무게’를 확 줄여버린 것이다.

이 물병은 2009년 독일 IF디자인어워드와 레드닷디자인어워드, 미국 IDEA디자인어워드와 SPARK디자인어워드 등 국제 디자인 공모전에서 잇따라 수상했다. 가능성을 테스트해 보자고 응모했는데 디자인을 안다는 외국 전문가들이 모두 박수를 쳐줬다. 이제 한국에서 물병만 만들면 되겠다… 하고 아주 쉽게 생각했었다고 한다.

지난해 2월 두 사람은 ‘1/2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을 했다. 아이티가 대지진에 쑥대밭이 됐을 때다. 설비 투자가 필요한 물병은 잠시 접어두고, 아이티 이재민을 돕는 ‘1/2 초콜릿’을 만들기로 했다. 같은 논리다. “초콜릿, 절반만 먹고 절반 값은 기부합시다.”

이들이 디자인한 지름 7㎝ 둥근 초콜릿에는 반지름 3.5㎝ 반달 모양 구멍이 뻥 뚫려 있다(큰 사진 속 박지원씨가 손에 들고 있는 것). 가격은 1개 2000원. ‘기부하는 절반’은 수익이 아니라 매출의 절반이다. 1개 사면 1000원이 아이티에 기부된다. 포장지에는 물병, 음식, 옷, 약, 집 등을 그렸다. 물병 그린 초콜릿을 사면 식수 지원에, 약 그림을 집으면 의약품 지원에 기부액이 쓰인다.

한 초콜릿 제조업체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둘은 통장을 털어 1000만원을 투자했다. 1만개를 만들었는데 납품받을 때 정산해 보니 개당 원가가 1200원이었다. 이건 팔 때마다 200원씩 손해 보는 장사다. 커피체인점이나 편의점에서 팔려 했는데 그런 곳은 이 원가로 감당할 수 없는 20∼25% 유통마진을 요구했다. 지난해 3월부터 주로 인터넷에서 판매해 500개를 팔았다. 실패한 비즈니스지만, 어쨌든 그 매출의 절반을 아이티에 기부하려고 굿네이버스와 협의 중이다.

김성준씨는 미국 스탠퍼드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하며 1/2 프로젝트 ‘미국지부’를 만들고 있다. 1/2 프로젝트 한국 대표가 된 박씨는 지난해 5월 팀을 꾸렸다. 초콜릿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생산과 유통을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10명을 모았는데 대부분 재능기부자거나 학생들이었다. 이번 아이템은 피자다.

-왜 피자를 택한 거죠?

“박원순 변호사님 덕분이에요. 박 변호사님 만나려고 ‘소셜이노베이션캠프’라는 경진대회에 참가했어요. 거기 심사위원이셨거든요. 36시간 안에 IT 기반 소셜비즈니스 아이템을 만들어내는 거였는데, ‘친절버스’ 애플리케이션으로 저희가 1등 했어요. 박 변호사님께 1/2 프로젝트 얘기를 했더니 도미노피자 대표님을 소개해 주셨어요.”

-피자도 한판 값에 반만 먹자는 거였나요?

“네. 피자 반쪽만 담기게 포장용기를 제작해서 1000판을 준비했어요. 절반 값이 기부되면 도미노피자가 나머지 절반 값을 지원해서 온전한 피자 1000판을 마련하고, 이걸로 보육시설 아이들에게 연말에 피자파티를 열어주자는 거였죠.”

-잘 팔렸나요?

“네티즌들이 이걸 도미노피자의 상술로 오해했어요. 인터넷에 악플이 엄청나게 달렸어요. 차마 눈뜨고 읽지 못할 내용으로…. 그래도 150판이 팔렸어요. 네이버 해피빈을 통해서 피자파티 신청을 받았는데, 정말 많은 곳에서 사연을 보내셨어요. 한 판, 두 판 신청한 곳도 많아요. 연말에 아이들에게 피자 한두 판 사주기 버거운 곳도 많다는 얘기죠. 30곳에서 피자파티를 했어요.”

박씨는 지난해 9월 1/2 프로젝트를 들고 영국 런던에서 열린 디자인 페스티벌 ‘텐트런던’에 참가했다. 영국인들의 반응은 한국에서와 많이 달랐다고 한다.

“영국의 대형 백화점 하비니콜스에서 연락이 왔어요. 1/2 상품들을 독점계약 하자고. 거기에 납품하려면 담당자와 면담약속 잡는 데만 1∼2년씩 기다려야 하는 곳이래요. 엄청난 기회였는데 고민하다 포기했어요. 아직 제가 감당할 자신이 없더라고요. 놀란 건, 그 사람들은 이 나눔 아이템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더라는 거였지요.”

그는 1/2 프로젝트를 시작한 뒤로 국내 웬만한 식·음료 기업엔 다 제안서를 보내고 찾아가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다들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아이템이 참 신선하다. 디자인도 훌륭하다. 젊은 사람들이 놀랍다. 정말 똑같이 이렇게 칭찬하셨는데, 그 다음 반응도 다 비슷했어요. 다른 회사랑 몇 번 하고 와라. 그때 생각해 보자.”

1/2 프로젝트의 1차 타깃은 20∼30대 트렌디한 여성이었다고 한다. 나눔을 예쁜 디자인에 담으면 기부도 하나의 액세서리가 될 수 있겠다, 생각했다. 다른 타깃은 자녀를 둔 여성이다. ‘주부’는 절대 반쪽 상품을 사지 않지만, ‘엄마’는 교육을 위해 아이에게 1/2 물병을 사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 생각이 틀렸던 건가요?

“우리나라는 이제 기부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는 단계잖아요. 저희가 좀 급했고,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 거죠. 저, 9월에 유학가요. 로드아일랜드대학 디자인스쿨. 성준씨는 미국 서부에서, 저는 동부에서 1/2 사업 해보려고요. 사람들한테 잘 들리게 목소리 좀 더 키우고, 한국 와서 다시 해야죠.”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