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로비스트다”… 잭슨 주한美상의 대표 ‘로비論’

입력 2011-04-21 17:46


“워싱턴엔 한국 로비스트만 없다”

#1. 지난달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정치자금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공무원이 담당·처리하는 사무에 관해 청탁 또는 알선하는 일로 정치자금을 기부하거나 받을 수 없다’던 문장의 주어가 ‘본인 외의 다른 공무원이’로 바뀌었다. 국회의원은 자신의 업무와 관련해 정치자금을 기부 받을 수 있게 허용한 셈이어서 사실상 ‘입법로비’ 길을 열어줬다는 비난이 거셌다.

#2. 지난해 12월, 외교통상부가 한·미FTA(자유무역협정) 미국 의회 인준을 위한 활동 자문료 명목 등으로 내년 예산 26억원을 편성한 사실이 알려졌다. 민주당 박주선 의원은 “명백한 로비 증거다. 한국에서 로비는 불법이다. 외교부가 국민 혈세를 낭비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상황이 이런데, 최근 에이미 잭슨(47)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 대표는 언론 기고문에서 “미국 스타일로 한국도 로비를 하라”고 주장했다. 청원경찰들이 국회에 로비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나라에서 이런 부추김은 낯설다. ‘미국 스타일 로비’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니 선뜻 만나자고 했다. 암참 대표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미국 기업들 이익을 대변하는 자리다. 그녀 역시 로비스트인 셈이다. 20일 만났다.

로비스트 에이미 잭슨

-지금도 미 의회에 로비스트로 등록돼 있나요?(잭슨은 미국무역대표부 한국 담당 부차관보를 지내다 2005년 로비회사로 옮겼다. 거기서 의회 담당 로비스트로 3년간 활동했다)

“로비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중요해요. 넓게 보면 모든 국민은 로비스트일 수 있죠. 자신이 원하는 걸 전달하기 위해 의원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저도 한국에 있는 미국 기업 이익을 위해 미국 의원들을 만나니 로비스트라고 볼 수 있죠. 하지만 미국 법은 자기 시간의 20%를 로비에 할애하는 사람을 로비스트로 규정합니다. 저는 관리대상인 직업 로비스트는 아닌 거죠.”

-로비는 정책에 영향을 끼치려고 돈을 쓰기도 하는데, 그건 나쁜 것 아닙니까?

“미국에서도 로비스트에 대한 인식이 좋지만은 않아요. 오해 때문이에요. 사람들은 로비스트들이 돈 많은 거대 기업만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의회에 가보면 수많은 단체가 보낸 로비스트가 있어요. 농민단체, 환경단체, 여성단체, 노인단체 등 정말 다양해요. 로비가 돈 있는 거대 기업만 위한 거라는 건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그녀가 일했던 로비회사 C&M인터내셔널은 홈페이지에서 자신들을 이렇게 소개한다. ‘우리 팀은 전직 무역협상가, 전직 외교관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우리 팀을 만나보세요.’

-고위공직자들이 퇴직 후 로비스트로 활동하는 건 어떤가요?

“회전문 인사라고 하죠. 때론 좋게 보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직업을 바꾸는 데 익숙해요. 행정부와 입법부를 오가기도 하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편이에요. 거부감이 강하지는 않아요.”

-돈 있는 자들은 능력 있는 로비스트를 살 수 있으니 정책에 더 큰 영향을 끼칠 수 있겠네요.

“비슷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미국에도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질문하면 아무도 반대하지 않아요. ‘그래서, 의회 장벽을 높이자는 얘긴가? 의원 만나기 힘들게 해야 하는가?’ 그러면 모두 ‘오우, 노(oh, No)’라고 하죠. 미국 수정헌법 제1조는 청원권을 명시하고 있어요. 누구든 의견 전달 기회를 보장받아야 해요. 그게 로비예요.”

로비스트 제도 도입을 주장하는 이들이 “로비를 허용하면 과격시위가 줄어들 것”이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 있다. 나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미국 정부가 로비스트를 양성화한 건 그것이 로비의 나쁜 측면을 없애는 데 효과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로비스트로 등록한 이들은 활동 내역을 공개해야 한다. 마침 이날은 분기별로 제출하는 미국 의회 로비스트 활동보고서 마감일이었다.

-활동보고서에는 어떤 내용이 담깁니까.

“고객과 맺은 계약서의 세부 내역을 상세히 적어요. 누구를 만날 것이고, 얼마를 받았고, 어떤 분야에 대해 로비할 건지 자세히 보고합니다.”

주미 한국대사관과 2006년 계약한 로비회사가 제출한 보고서를 확인해 봤다. 그녀의 말이 맞다.

-사람이 궁하면 온갖 수단을 다 쓰기 마련입니다.

“식사나 선물 제공은 최근에 더 엄격히 금지됐어요. 커피 한 잔도 얻어 마실 수 없죠. 로비스트가 식사나 음료가 포함된 행사를 열기도 하는데 사전에 의회윤리국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때론 의원을 연사로 초청했다가 윤리국 허락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럴 땐 의원이 자기 밥값을 냅니다. 의원뿐만 아니라 보좌관들에게도 적용됩니다. 너무 엄격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긴 하죠.”

-로비스트들이 정치인에게 합법적으로 정치자금을 제공할 수 있습니까.

“로비스트 절대 다수는 로비 대상자에게 정치자금을 주지 않아요. 개인이 개인에게 기부할 수 있는 한도는 겨우 1000∼2000달러에 불과하죠. 그것마저 투명하게 공개해요. 구글에서 검색하면 제가 누구에게 얼마를 기부했는지 나옵니다.”

투명하게 공개하면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된다. 어차피 로비를 막을 수 없다면 누가 누구에게 뭘 로비하는지 다 알게 하자, 이게 그들의 생각인 것 같다.

미국에 로비하라

워싱턴 정가에서 한국 측 로비스트들은 존재감이 별로 없다고 한다. 한국 정부나 기업은 일회성으로 간혹 로비스트를 고용할 뿐이다. 외교통상부가 미국 로비스트를 고용한 걸 두고 비난이 일듯 국내 정서가 로비에 호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나 기업이 미국에서 로비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나요?

“반드시 그래야죠. 한국 기업들에 수차례 강조했어요. 제가 무역대표부에 있을 때 일본 기업은 저를 자주 찾았지만 한국 기업은 거의 오지 않았어요. 이건 엄청난 기회 손실입니다. 의견 전달할 기회를 잃는 겁니다. 자신과 이해관계가 다른 이들의 의견만 전달되죠. 한국 기업은 많은 미국인을 고용하면서도 로비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의원들이 양팔 벌려 환영할 텐데 말이죠. 미국에선 미국인처럼 로비해야 해요. 로비는 오히려 입법부나 행정부 정책입안자들이 원하기도 합니다. 다양한 얘기를 들어보고 싶은 거죠. 여러 이해당사자 얘기를 들으려면 로비스트 만나는 게 가장 좋거든요.”

한국 정부나 단체의 미국 로비스트 활용 현황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미국 로비법은 ‘로비활동공개법’(미국단체·미국인이 의뢰인인 경우 적용)과 ‘외국대리인등록법’(외국단체·외국인이 의뢰인인 경우)으로 나뉜다.

로비활동공개법이 제정되기 훨씬 전인 1938년, 나치 파시스트 영국 등 외국세력이 미국을 제2차 세계대전에 끌어들이거나 중립을 지키게 하려고 선전활동을 심하게 벌이자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외국대리인등록법’이 제정됐다. 이 법에 따라 미 법무부는 1년에 두 번 의회에 보고서를 제출한다.

보고서엔 외국정부·외국단체·외국인을 의뢰인으로 하는 에이전트들이 망라돼 있다. 2010년 상반기 보고서가 인터넷에 공개된 가장 최신 자료다. 한국 정부나 단체의 활동 19건이 명시돼 있다. 일본은 35건이었다.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한국 측 의뢰인은 ‘주미 한국대사관’이다. 4개 로비회사와 총 24만5045달러어치 계약을 맺고 있었다.

세부 계약 내용은 ①미국 관리와 한·미FTA에 대해 논의할 때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조언 제공, 6개월 계약, 2만 달러 ②한·미FTA에 대한 미국 무역 정책 변화에 대한 조언 제공, 6개월 계약, 6만5829달러 ③미디어 관리, 6개월 계약, 9만9216달러 ④한·미FTA 설득을 위한 미 의회 접촉 도움, 6개월 계약, 6만 달러 등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한국관광공사, 한국무역협회, 한국지방자치국제화재단 등도 로비스트를 고용해 활동하고 있다. 무역투자진흥공사는 캐시디(Cassidy & Associates)라는 회사와 8만5000달러에 계약을 맺었다.

공사 측은 “미국 정부조달 시장에 진출하려고 2000년대 초반부터 노력했는데 성과가 없었다. 지난해부터 연방정부 기관들의 조달시스템을 잘 아는 에이전트와 계약했다. 우리에게 유리한 아이템을 골라주고 여러 자문을 해줘서 올해 10∼15개 업체가 선정됐다. 올해도 그 에이전트와 계약했다”고 설명했다. 돈 들인 값을 하더라는 말로 들렸다.

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