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봉제공장 운영 유영민씨가 말하는 요즘 北 사정 “배급이 끊어진 지 오래… 절박하다”
입력 2011-04-20 18:12
그는 포목상의 점원이었다. 북한 평양에 직원 700여명을 두고 봉제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유영민(54·서울 동숭교회)씨 이야기다. 20세에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6년 동안 옷감을 나르는 일을 했다. 서울 동대문 광장시장의 주단가게 참한 규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척 보고 옷감의 재질을 알아 맞힐 정도로 눈썰미가 좋았다.
그의 재주를 아까워하던 한복 디자이너가 있었다. 이미옥(49)씨. 그녀는 3대째 전통 의상을 만드는 ‘은호주단’의 둘째 딸이었다. 그녀는 유씨의 손놀림과 통근 마음씨에 그만 반했다. 스물 한 살 무렵 그녀는 평생의 반려자가 될 남자에게 세상에서 가장 값진 선물을 전했다. 고급 옷감으로 손수 지은 한복이 아니었다. 빨강색 가죽의 성경이었다. 이듬해 유씨는 이씨의 소원대로 세례를 받고 한평생 봉사를 하는 크리스천이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
기회는 1996년에 찾아왔다. 서정우 동숭교회 목사와 중국 옌볜으로 선교여행을 떠난 것이 계기가 됐다. 북한 동포가 처참하게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부터다. 그로부터 3년 후 그 꿈은 평양에서 첫 싹이 돋았다. 2004년 북한 용천 폭발사고가 터졌을 땐 국제구호NGO 월드비전과 함께 모포 1만장을 전달하는 실무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같은 시기에 심장병으로 고통 받는 중국의 어린이들을 국내로 데려와 수술해주는 일을 시작했다. 평양 봉제공장은 최근 남북관계 경색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을 먹여 살리는 일터가 됐다. 이 봉제공장은 남북관계 악화로 간접 경영하고 있다. 심장병 어린이 돕기 사업은 SK그룹의 대규모 지원에 힘입어 올해로 100명의 어린이가 수술을 받는 기록을 세우게 됐다.
유씨는 지난 주말 중국 단둥(丹東)으로 건너가 심장병으로 절망에 빠진 어린이 8명을 데리고 왔다. 19일 경기도 부천 세종병원에서 그를 만났다.
-북한 평양에 봉제공장을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다.
“한복에 들어가는 각종 문양의 수예와 전통 공예품용 반제품을 만든다. 서울 인사동에서 판매되는 제품 80% 이상이 북한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면 된다.”
-북한의 최근 사정은 어떤가.
“지난해 화폐개혁 때 무척 힘들었다. 배급이 끊어진 지 오래됐다. 다행히 지금은 내성이 생겼다. 나름대로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인분을 비닐에 담아서 팔기도 한다. 비료 만드는데 필수품이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북한의 경제 사정이 얼마나 절박한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재봉틀 소리에 맞춰 이 민족을 구원해달라는 기도를 드린다. 성경책을 전달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지만 기도하고 간단한 말씀을 전하기도 한다.”
-그 사람들 아직도 자존심이 그렇게 센가.
“아직까지 굶어 죽을지라도 밥은 얻어먹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대부분 옥수수와 보리밥을 싸온다. 그래서 우리 공장에서도 국물에 고기 등 영양분이 많은 것들을 듬뿍 넣어준다. 초코파이를 줘도 먹지 않는다. 집에 있는 가족에게 주기 위해 비닐은 벗기고 도시락에 담아간다.”
-아파트를 매매한다는 소문도 있던데.
“사유재산이 인정되지 않지만 최근엔 아파트도 달러로 거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기가 막힌 것은 아파트 내에서는 닭과 돼지 등을 키운다. 유사시를 대비해 기르는 것이다.”
-넘치도록 퍼줘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말이 안 되는 소린 줄 안다. 당 간부와 군인들이 먼저 먹고 남을 정도가 돼야 일반 인민들에게 먹을 것이 돌아간다. 아무리 현장에서 모니터링을 잘 하면 뭐하나. 지켜보는 사람이 있을 땐 나눠주지만 그들이 돌아가면 바로 빼앗긴다. 힘없는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차고 넘치도록 줘야 한다는 역설이다.”
-한국교회가 너무 눈치만 보고 있다는 비판적인 목소리도 있다.
“다른 종교 단체는 지난 3월에 밀가루 300t을 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하지만 개신교는 뭘 그렇게 눈치를 살피는지 모르겠다. 동포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무슨 정부의 입장만 쳐다보고 있는가. 더 이상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기 전에 도와야 한다. 독일의 통일에서 귀한 교훈을 배웠지 않은가. 모른 체 눈감고 있지만 하나님은 다 아신다.”
-대북 사업을 하면서 수많은 고비도 많았을 텐데.
“남북 관계가 틀어지면서 남한의 우리 공장도 창업 15년 만인 2009년에 무너졌었다. ‘가배공예’이라고 잘 나가던 기업이었다. 하지만 통일사업 한답시고 무리한 지출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날 임진각 망배단에서 유서를 쓰고 죽으려는 각오를 했는데, 실향민의 애절한 모습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떻게 재기에 성공했나.
“아이러니하게도 한복이 살려줬다. 사양 산업이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가업으로 이어온 것이 마침내 효자가 됐다. 지난해에 유네스코 중요무형문화재 종묘대제 행사에 쓰이는 의상 납품 행사에서 아내가 만든 한복이 채택되는 행운을 얻었다. 그래서 지난해 1월 1일 부도난 수표를 모두 갚았다. 아내는 지금 서울 청담동에서 ‘이미옥 한복’을 운영하고 있다. 장인 이은호(78), 장모 신동순(75) 집사는 한복 업계에선 많이 알려진 분이다.
-최근 서울 신라호텔에서 한복이 문전박대를 당했을 때 어땠나.
“참 슬펐다. 목숨을 걸고 지켜온 한복이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하지만 한복을 만드는 사람도 문제가 많다. 특히 디자이너 책임도 크다. 왜 한복을 화장실에서 갈아입도록 불편하게 만들었느냔 말이다. 마네킹용이나 다름없다. 실용성은 내팽개치고 멋만 추구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 개량 한복은 과거 운동권이 즐겨 입는 옷으로 전락했다. 땅에 질질 끌리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옷을 누가 입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이웃 일본은 다르다. 성년식 할 땐 의무적으로 기모노를 입을 정도로 전통 의상을 사랑하고 즐겨 입는데 우린 어떤가.”
-중국 심장병 어린이 돕기 사업을 왜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2004년에 단둥에 사업하러 갔다가 심장병에 걸려 신음하는 어린이들을 만난 다음부터다. 처음엔 혼자 했지만 차츰 동참하는 분들이 많이 늘어났다. 월드비전 박창빈 목사님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2006부터는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님이 큰 도움을 주셨다. 중국한인기독실업인회 성구대 장로님이 역할이 크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SK차이나가 수술비와 소요 경비 전액을 지원하고 있다.”
-앞으로 비전과 사명이 있다면.
“단둥에 북한을 돕는 베이스캠프를 만들고 싶다. 올 여름에 봉제 디자인 샘플 공장을 세워 OEM(주문자 생산 방식)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수예로 만든 ‘최후의 심판’ 작품을 우리가 만들었다. 북한 기술자들을 불러서 제작했다. 북한에 실력이 뛰어난 자수 팀이 있다. 그들은 실과 바늘만 있으면 먹고 살 수 있다. 사업장을 더 확장해서 그들에게 일감을 주고 싶다. 북한의 굶주린 1000만여명을 살리는 일에 죽을 각오로 나설 계획이다. 개인적으로 월 수십t의 밀가루를 지원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더 늦기 전에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간곡히 요청한다.”
글 윤중식 기자·사진 윤여홍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