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 빈민가·난민촌을 가다-(上) 조혼 피해 고향 떠난 소녀들] 컴컴한 교실, 소녀들 눈은 빛났다

입력 2011-04-20 18:14


메마른 벌판에서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있다. 땀에 전 아이들의 왁자지껄함 위로 멀리 첨탑에서 내보내는 ‘아잔(무슬림의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이 이슬람 지역임을 일깨운다. 북동부 아프리카의 빈국, 에티오피아. 이곳의 아이들도 여느 나라 아이들과 똑같이 즐겁게 뛰어논다. 배고픔과 목마름, 말라리아 등 이들을 위협하는 주변 환경들로부터 무사할 수 있다면,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진다면, 이 아이들도 마음껏 자신의 꿈을 키우며 성장할 수 있으리라.

유엔을 비롯한 세계 많은 국가와 구호 단체들이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돕고 있다. 미국 워싱턴에 본부를 둔 유엔재단(UN Foundation)도 그들 중 하나다. 유엔재단 직원들과 한국 종교계 후원자들이 지난 11∼15일 에티오피아의 도시 빈민가와 접경지대 난민촌을 찾았다. 현지 아이들을 실질적으로 돕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이들과의 동행을 2회 시리즈로 전한다.

지난 11일 오후 일행은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메르카토 지역으로 향했다. ‘고향을 떠난’ 소녀들이 기다린다고 했다. 대표적 슬럼가인 메르카토 지역은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며 안내를 맡은 유엔인구기금(UNFPA) 직원 버하누 레게세가 말했다.

낡은 버스들이 가득한 시외버스 터미널 뒤편 길로 들어서자 큰 재래시장이 나타났다. 사람과 차량, 동물까지 뒤엉켜 몹시 번잡했다. 향신료 냄새가 밴 악취가 차창 안으로 들어왔다.

“무리를 지어서 빠른 걸음으로 따라 오라. 사진을 찍지 마라.”

레게세는 주의를 주고는 차에서 내려 앞장섰다. 스무 살도 안돼 보이는 여성이 갓난아기를 안고 다가와 손짓으로 돈을 달라고 했다. 아기는 비쩍 말랐는데, 머리가 기형적으로 컸다. 인파를 헤치고 종종걸음으로 도착한 단층 건물. 그 흙벽 구조물 안에서 재잘재잘 아이들이 공부하는 소리가 들렸다.

‘비러 테스파(Biruh Tesfa).’

에티오피아 암하라어로 ‘밝은 미래’라는 뜻의 이곳은 강제적인 조혼(早婚)을 피해 시골에서 올라온 5∼20세 소녀들을 위한 쉼터 겸 교육센터다. 유엔재단이 자금을 지원했고, UNFPA가 운영을 맡고 있다. UNFPA 에티오피아 본부 베노아 칼라사 대표는 “소녀들을 지키고, 소녀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것이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밝은 미래’ 센터는 2년 전 문을 열었다. ‘물을 기를 수 있는 나이만 되면 결혼시킨다’는 에티오피아 농촌 지역의 조혼 풍습을 줄이자는 운동이 출발점이 됐다. UNFPA가 2009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에티오피아 여성 중 25.3%가 15세 전에 결혼을 한다. 특히 서북부 암하라 지역의 경우 이 비율이 52.4%에 달해 세계에서 조혼 비율이 가장 높다. 많은 가정이 딸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지 않고, ‘숟가락을 덜기 위해’ 서둘러 시집을 보내다 보니 15세 미만에 결혼한 에티오피아 여성 중 37.7%는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UNFPA는 암하라 지역의 강제적 조혼을 막기 위해 2005년부터 5년간 유엔재단과 나이키재단으로부터 150만 달러를 지원받아 ‘이브의 빛’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한국의 5개 종파 여성 수도자들의 모임인 ‘삼소회’도 기금을 보탰다. 삼소회는 3년간 100만 달러를 지원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요즘도 모금활동을 하고 있다. ‘이브의 빛’은 소녀들을 모집해서 읽고 쓰는 능력, 삶에 필요한 기술, 에이즈 등 각종 질병 예방법뿐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권리 등을 가르치는 것이 주요 활동이었는데, 1만1000명 이상이 참가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그리고 이를 확대해 2009년부터 아디스아바바와 암하라 지역의 중심 도시인 바히르 다르에서 ‘밝은 미래’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곳의 소녀들은 모두 고향에서 도망쳤거나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죠. 대부분 가정부로 일하면서 최소한의 의료 보호도 받지 못한 채 가혹한 노동 착취를 당하고, 성적 유린을 당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들에겐 배움이 없으면 꿈과 희망도 없습니다.”

‘밝은 미래’ 센터 책임자인 젤라렘이 말했다.

에티오피아 정부가 예전 지역 사무소로 쓰던 것을 제공했다는 센터 건물은 현재 세 칸의 교실로 쓰이고 있다. 여기서 620여명의 소녀들이 5∼10세, 10∼15세, 15∼20세 등 연령별로 나뉘어 하루 2∼3시간씩 돌아가며 공부를 한다. 등록 소녀들은 기초적인 의료 서비스는 물론 향후 정규 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지원받는다.

교실은 어두컴컴했다. 천장의 전구 하나가 힘겹게 빛을 냈는데, 아이들의 윤곽을 겨우 구분할 수 있었다. 때문에 아이들의 눈동자가 유독 빛나 보였다. 진회색 페인트를 칠해 놓은 흙벽에는 낡은 칠판이 위태롭게 기울어 달렸고, 간단한 영어 단어를 써 놓은 종이가 빛바랜 채 그 옆에 붙어 있었다. 아이들은 1m 길이의 녹슨 철제 책상에 4명씩 앉았다. 필기도구가 없는 이들도 많았다. 의사처럼 흰색 가운을 입은 교사가 아이들 사이를 오가며 열정적으로 뭔가를 설명했다.

티기스트(19)는 13세 때 고향인 암하라에서 도망쳐 아디스아바바로 올라왔다. 아버지가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을 시키려 하자 집을 나온 뒤 무작정 버스를 탔고 꼬박 이틀 걸려 상경했다. 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지난해 교사들이 집주인을 설득해 ‘밝은 미래’에 나올 수 있게 될 때까지 학교라는 데를 가 본 적이 없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도 배우고, 특히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됐어요. 감자튀김, 쿠키 같은 것을 조금 만들어서 시장에서 팔고 있는데 제 가게를 갖는 것이 소원입니다.”

4년 전 역시 조혼이 싫어 집을 나왔다는 자이바나(16)는 “이후 가족을 한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그때 내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한다”며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의사가 된 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친척집에 머물고 있는데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식료품 가게에서 일하고 있다.

이날 유엔재단 직원이 또래의 미국 소녀들이 쓴 격려 엽서를 나눠줬다. 이어 ‘걸 업(Girl Up)’ 선언서를 낭독했다. “나는 소녀입니다. 나는 총명하고, 뭐든 할 수 있으며, 제가 할 말은 다 합니다”로 시작해 “당신은 소녀를 보지만, 나는 미래를 봅니다”로 끝나는 글이었다.

날이 저물 무렵 소녀들은 긴 그림자를 끌고 돌아갔다. 저들을 기다리는 것은 가족과 휴식이 아니라 고단한 노동이다. 그러나 소녀들은 희망의 끈을 잡고 있고, 내일 다시 ‘밝은 미래’를 찾아올 것이다. “소녀야 일어나라”(막 5:41)

■ 유엔재단(UN Foundation)

1998년 CNN 창립자인 테드 터너가 유엔의 활동을 돕기 위해 10억 달러의 자산을 기부해 설립했다. 아동 보건, 여성과 인구, 기후 변화 등 유엔의 국제 공조 사업을 돕기 위해 후원 그룹을 결성하고, 재원을 조성하는 일 등을 한다. 티모시 워스 전 미국 상원의원, 코피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 라니아 알 압둘라 요르단 왕비 등이 이사회에 참여하고 있다. 그동안 400개 이상의 기관·기업과 파트너십을 구축했으며, 40여개의 유엔 산하 기구 및 전 세계 100여개 정부와 협력하고 있다. 한국본부는 지난해 4월 25일 세계 말라리아의 날을 맞아 본격 출범했으며, 아프리카에 모기장을 보내자는 뜻의 ‘네츠 고(Net’s Go!)’ 캠페인을 벌여 최근까지 5억원 정도를 모금했다.

아디스아바바(에티오피아)=글·사진 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