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상온] ‘정치적으로 올바른(PC)’ 말

입력 2011-04-20 17:51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대학의 학장인 콜먼 실크 교수는 고전학자로서 명망이 높다. 그런 그가 말 한마디 잘못해 학교에서 쫓겨난다. 그는 학생 두 명이 개강 후 몇 주가 지나도록 한 번도 자신의 강의에 출석하지 않자 교실에서 “이 두 사람은 뭔가? 스푸크(spook)인가?”라고 질책한다. 스푸크는 구어로 ‘유령’이란 뜻. 모습을 보이지 않는 수강생들을 비꼰 것이다.

그러나 스푸크는 속어로 ‘검둥이(nigger)’라는 뜻도 된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장기 결석한 두 학생이 모두 흑인이었던 것. 실크 교수는 두 학생을 전혀 본 적이 없으므로 흑인이었는지도 몰랐다고 항변하지만 결국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오명을 쓰고 물러난다.

단골 노벨상 후보인 미국 작가 필립 로스가 2000년 발표해 평단의 호평을 얻으면서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휴먼 스테인’(Human Stain·‘인간의 오점’쯤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에 나오는 얘기다. 소설의 시대 배경은 1990년대. 미국의 신좌파에 의해 70년대부터 시작된 이른바 ‘정치적으로 올바른(PC·Politically Correct)’ 말 쓰기가 열풍처럼 휘몰아칠 때였다.

PC가 무엇인가? 성(性), 인종, 종교, 직업, 신체조건 등 그 어떤 부문을 막론하고 편견을 조장하거나 차별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회적 움직임이었다. 그 결과 수많은 표현이 새로 생겨났다. 대표적인 예가 로스의 소설에서도 키워드가 된 ‘흑인’. 비칭(卑稱)인 nigger 대신 Black으로 바뀌었으나 PC로 인해 다시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다 보니 위선적이거나 희한한 말도 생겨났다. 가령 ‘머리가 벗겨진(bald)’은 ‘빗이 없어도 되는(comb-free)’, ‘살찐(fat)’은 ‘수평적으로 축복받은(horizontally gifted)’이란 식으로. 오늘날 PC라는 용어가 대개 경멸적으로 사용되는 이유다.

하지만 PC가 용어 순화를 통해 나름대로 사람들의 차별적 의식을 억누르는 데 기여한 부분은 분명히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살색’이 ‘살구색’으로 바뀌었거니와 곧 군 장교 임관선서와 병사 입영선서에 들어 있는 ‘민족’이란 표현을 ‘국민’으로 바꾼다고 한다. 다문화가정이 현저히 늘고, 외관상 명백한 혼혈인도 현역으로 복무하도록 병역법이 바뀐 결과다. 굳이 ‘정치적으로 올바름’을 들먹일 것도 없이 이젠 ‘민족의 덫’에서 빠져나올 때도 됐다.

김상온 논설위원 so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