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박현동] 누가 서남표 총장에게 돌을 던지나
입력 2011-04-20 21:29
“실패를 두려워하는 나약한 청년을 만들어 놓고, 미래를 책임지라고 할 것인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조국 교수는 카이스트(KAIST)를 ‘Killers Advanced Institute of Stupid Technology’라고 규정했다. ‘살인자들의 멍청한 고등기술원’ 정도로 해석된다.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의 일방적 개혁정책이 학생들의 잇단 자살을 초래했다며 풍자한 말이다. 논란이 되자 그는 이 말을 트위터에서 삭제했다. 사과도 했다. 그러면서 ‘상처받은 구성원이 있다면…’이라고 단서를 달았다. 진정성을 느낄 수 없다.
사회적 위치나 영향력 등을 감안할 때 조 교수의 태도는 경박스럽다. 소통의 부재를 탓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소통을 거부하는 극단적 표현을 했다. 더욱이 조 교수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새로운 아이콘으로 떠오르는 인물이다. 우리는 그의 학자적 양심을 믿어왔고, 참지식인의 모습을 기대해 왔다. 그토록 갈망하는 ‘공정사회’ 실현도 앞당겨질 것이라고 희망을 걸었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실망도 크다. 카이스트 사태를 무 자르듯 그렇게 간단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가? 무책임하다. 진지한 고민도, 애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정치권도 비슷했다. 여야가 따로 없었다. 서 총장은 국회에 불려갔다. 그들은 서 총장을 ‘킬러(Killer·살인자)’라며 호통쳤다. 서 총장의 경쟁지상주의 정책이 학생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대안 제시는 없었다. 정치권은 늘 이런 식이다. 서 총장을 두둔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한때 서남표식 개혁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언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소통 없는 경쟁지상주의가 학생들을 사지(死地)로 내몰았다고 몰아붙였다. 왜, 어떻게를 모색하는 것이 더 시급한데도 희생양부터 찾으려고 했다.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모인 곳이 카이스트다. 낙오한 경험이 그리 없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경쟁에서 졌을 때, 또 그 결과가 경제적 부담으로 전가됐을 때의 좌절감은 짐작이 가고 남는다. 잠재력 있는 인재를 뽑겠다며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해 놓고 획일화된 잣대로 점수를 매기는 것은 천재성을 죽일 수 있다. 경쟁에 내몰린 학생들이 탈출구를 찾지 못한다면, 그래서 미래에 대한 꿈을 꾸지 못한다면 불행한 사태는 반복될 것이라는 경고 역시 귀담아들을 만하다. 영혼 없는 청춘이 어찌 창의적일 수 있을까? 옳은 지적이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영어 강의를 줄이고 경쟁을 완화한다고 창의성이 살아나고 청년의 꿈은 이뤄질까? ‘학생과 교수가 편한 교육과정’이 학업성취도를 높이고, 경쟁력을 갖추게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물음에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강철은 두드릴수록 단단해진다고 한다. 성공은 아흔아홉번 실패의 결과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경쟁과 실패를 두려워하는 나약한 청년을 만들어놓고 우리나라의 미래를 책임지라고 할 것인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어떤 조직이든 일정 수준의 경쟁은 피할 수 없다. 물론 시장의 경쟁과는 다르지만 대학 교육 분야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세계 최고를 꿈꾼다면.
솔직히 국내 대학의 글로벌 경쟁력은 거론하기조차 민망하다. 국제적인 대학평가 기관이 매년 발표하는 대학별 순위를 보면 일본은 물론이고 중국에 한참 뒤진다. 교육경쟁력이 국가경쟁력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대학 개혁은 멈출 수 없다. 경제에 국경이 없다지만 교육이야말로 국경 없는 전쟁터다. 실력 없는 전사(戰士)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나? 앞으로도 붕어빵 찍어내듯 대학생을 배출하는 교육을 답습한다면 미래는 끔찍하다. 이번 사태가 신자유주의식 교육의 폐해라는 등 이념적 접근을 시도하는 것도 경계한다.
이제 공은 카이스트 혁신비상위원회 손에 넘어갔다. 많은 이들이 혁신위의 결정을 지켜보고 있다. 그들의 판단에 우리 대학교육의 앞날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충분히 이성적이고 현명하다. 정부든 정치권이든 혁신위가 결론을 내리기 전에 물이 넘치네, 모자라네 하면서 솥뚜껑 여는 우(愚)를 범하지 말기를 당부한다.
박현동 편집국 부국장 hd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