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린 꽃잎 피어날때 ‘천년의 사랑’도 피어난다… 애틋한 사연 간직한 경주의 길
입력 2011-04-20 17:28
이루지 못한 사랑은 더 애틋한 법이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미완성의 사랑은 전설이나 설화의 소재로, 혹은 문학이나 예술작품으로 남아 더 오랜 세월 생명력을 유지한다. ‘아사달과 아사녀’를 비롯해 이루지 못한 사랑을 테마로 한 이야기들이 전해오는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를 찾아본다.
신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은 다분히 판타지적이다. 원성왕 때의 호원설화가 대표적이다. 김현이라는 사람은 탑돌이를 하다 처녀로 변신한 호랑이와 하루저녁 부부의 정을 맺는다. 이루지 못할 사랑임을 깨달은 호랑이는 김현을 출세시키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한옥호텔 ‘라궁’으로 유명한 신라밀레니엄파크는 ‘호낭자의 사랑’을 주제로 하루 5차례 인형극을 상연하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된 현곡면 오류리의 등나무에 얽힌 사랑은 더욱 극적이다. 이웃집 총각을 흠모하던 자매는 전쟁터에 나간 총각이 전사했다는 잘못된 소식을 듣고 연못에 몸을 던졌고 훗날 늠름한 화랑이 되어 귀향한 총각도 두 자매의 소식을 듣고 연못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이후 연못에서 한 그루의 팽나무와 두 그루의 등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등나무는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는 듯 팽나무를 얼키설키 휘감고 있다. 팽나무는 고사했지만 수령 1000년이 넘었다는 등나무는 지금도 5월이 오면 꽃을 피우고 향긋한 향기를 내뿜는다.
흥덕왕과 장화부인에 얽힌 순애보는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흥덕왕은 왕비가 죽자 앵무새도 짝을 잃고 혼자 슬퍼하다 죽는다며 재혼을 거부했다. 그리고 10년 후 세상을 떠나면서 왕비와 합장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흥덕왕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상징하듯 안강읍 육통리에 위치한 흥덕왕릉의 도래솔은 서로 몸을 부대끼며 서역인 모습의 무인석과 함께 천년의 사랑을 지키고 있다.
선덕여왕을 짝사랑한 신라 청년의 열정은 차라리 스토커 수준이다. 평민인 지귀는 어느 날 월성에서 영묘사로 행차하던 선덕여왕의 행렬을 따라가다 군사들의 제지를 당한다. 여왕의 배려로 영묘사까지 온 지귀는 탑 아래서 잠에 빠져들고 선덕여왕은 금팔찌를 뽑아 지귀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여왕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지귀는 화병으로 몸이 불덩이가 되어 탑은 물론 영묘사까지 불태웠다고 전해온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은 선덕여왕과 지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주제로 제작한 3D입체영화 ‘벽루천’을 8월 12일부터 60일 동안 상영할 계획이다.
“너를 조각하련다 너를 새기련다/이 세상 끝나는 끝까지/이 하늘 끝나는 날까지/이 하늘 다하는 끝 끝까지/찾아다니며 너를 새기련다/바위면 바위에 들이면 들몸에/미소 짓고 살다 돌아가 네 입술/눈물 짓고 살다 돌아간 네 입술/너를 새기련다”
아사달과 아사녀에 얽힌 슬픈 사랑의 이야기는 신동엽의 오페레타 ‘석가탑’의 노래가사로 인해 더욱 가슴이 미어진다. 아사녀가 투신했다는 영지의 도로 변 솔숲에는 아사달이 아사녀의 모습을 새겼다는 조각상이 서 있고, 그 옆에는 아사녀의 마음을 상징하듯 진달래 한 그루가 분홍색 꽃을 활짝 피웠다. 석공 아사달과 부인 아사녀는 백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견도 있다. 동국대학교 강석근 교수는 올 2월에 발표한 논문에서 “아사달과 아사녀의 이야기는 현진건이 장편소설 ‘무영탑’에서 창작한 허구”라며 “석공은 이름 없는 당나라 사람이고 그를 찾아온 사람이 누이동생인 아사녀”라고 주장했다.
이밖에도 신라 최고의 미녀로 꼽혔던 유부녀 미실과 청년 사다함의 이루지 못한 사랑, 김유신 장군과 천관녀의 슬픈 로맨스, 신라의 대학자 설총을 낳은 원효와 요석공주의 3일간의 사랑 등 경주 곳곳에는 이루지 못한 사랑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경주시는 2013년에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이 얽힌 월정교 복원공사를 완료하고, 사랑을 테마로 한 갖가지 사업을 추진하는 등 경주를 ‘사랑의 도시’로 조성할 계획이다.
경주=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