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빛 무릉도원… 왕버드나무 새순·복사꽃 장관 이룬 경산 반곡지

입력 2011-04-20 17:43


연두색 왕버드나무 새순과 분홍색 복사꽃이 파스텔 톤의 반영을 그리는 반곡지는 한국판 무릉도원이다. 반곡지를 중심으로 30여 가구가 오순도순 처마를 맞댄 경북 경산시 남산면의 반곡리는 해마다 이맘때면 복사꽃이 장관을 이루는 동요 속 산골마을을 연출한다.

경산 반곡지는 찾아가는 길부터 꿈길을 걷는 듯 황홀하다. 중국 진나라의 한 어부가 복숭아꽃잎이 떠내려 오는 강을 거슬러 오르다 동굴 속에서 무릉도원을 발견했듯 한국판 무릉도원은 경산시내에서 복사꽃길을 달려 별밤곡이라는 고개를 넘어야 만난다.

30∼40년 전 마을 주민들이 고된 나뭇짐을 지고 넘던 별밤곡 고개는 복사꽃 천지. 한국전쟁 이후 심기 시작한 복숭아나무가 마을과 구릉을 뒤덮더니 급기야 분홍색 등고선을 그리며 산을 올라 푸른 하늘과 맞닿았다. 반곡리는 본래 빈한한 농촌이었으나 복숭아 재배로 부농의 꿈을 이룬 마을.

2만5000㎡ 규모의 반곡지는 경산의 여느 저수지와 마찬가지로 낚시터로 유명했다. 물이 워낙 맑아 한때는 ‘민물새우 반 물 반’이었으나 지금은 예전만큼 맑지는 않다. 하지만 팔뚝만한 붕어와 가물치가 심심찮게 낚여 평일에도 강태공들이 몰려들어 손맛을 즐기는 곳이다.

반곡지가 사진촬영 명소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몇 해 전부터. 경산지역 사진작가들이 반곡지 둑에 뿌리를 내린 20여 그루의 아름드리 왕버드나무 반영을 인터넷에 올리자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청송의 주산지와 비슷한 느낌이라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계절 중에서도 반곡지가 가장 아름다운 때는 왕버드나무 고목에서 연두색 새순이 돋아나고 저수지를 둘러싼 과수원에서 복사꽃이 만발하는 4월 중순에서 하순 무렵. 특히 이른 아침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바람이 잔잔하면 수면에 비친 왕버드나무 반영이 데칼코마니 기법의 그림처럼 환상적이다.

반곡지의 왕버드나무 수령이 얼마인지 아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주민들의 기억에 의하면 저수지 입구에 뿌리를 내린 어린아이 몸통 굵기의 작은 왕버드나무가 해방 직후 심은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어른 세 명이 안기 어려울 정도로 굵은 왕버드나무의 수령은 300년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자수명한 고장에 인물이 없을 수 없다. 삼국시대 이전 압독국의 터전인 경산은 아버지 원효와 아들 설총, 삼국유사를 집필한 일연이 태어나 예로부터 삼성현의 고장으로 불린다. 반곡리로 가는 길에는 내년 완공을 목표로 삼성현역사문화단지 공사가 한창이고 반곡마을 뒤로는 산벚나무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있는 삼성산(554m)이 우뚝 솟아있다.

산골마을인 남산면 반곡리가 자랑하는 인물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신사참배를 거부해 일제로부터 37번이나 체포, 구금, 투옥, 고문을 당한 우암(寓岩) 김용규(1894∼1968) 목사다. 주기철 목사와 함께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김 목사는 목회활동을 하면서 독립투사로 변신한다. 그는 독립이 되자 경산군 건국준비위원장을 거쳐 초대 경산군수와 경북도청 인사처장 등을 지냈지만 정부가 수립되자 목회자로 되돌아와 여생을 보낸다. 대구 신암동 선열묘지에 있는 김용규 목사 묘비에는 3·1운동 민족대표 이갑성 옹이 쓴 비문과 함께 청록파 시인 박목월의 추모시가 새겨져 있다.

유서 깊은 반곡리에 아침이 찾아왔다. 고요하던 반곡지 수면에서 물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태양이 고도를 높이자 왕버드나무의 연두색 새순이 발광을 하고 분홍색 복사꽃은 새악시의 볼처럼 더욱 화사해진다. 연두색과 분홍색 물감을 흩뿌린 듯 반곡지 수면이 색색으로 물들 즈음 한가롭게 자맥질 하던 물오리 몇 마리가 동심원을 그린다.

150m 길이의 반곡지 둑길은 웨딩촬영지로도 이름났다. 제비꽃과 개불알풀꽃 등 수수하면서도 청초한 모습의 봄꽃들이 수를 놓은 둑길에 서면 오랜 세월 끝에 고사목으로 늙어가는 왕버드나무가 일렬로 늘어서 연륜을 자랑한다. 어떤 나무는 아직도 노익장을 과시하고 어떤 나무는 속이 텅 빈 채 죽어가지만 가지에서는 수백 년째 새싹이 돋아난다. 굵은 가지를 물 속에 드리운 왕버드나무는 반곡지를 대표하는 나무.

둑의 중간쯤엔 대나무를 엮어 수면으로 돌출시킨 웨딩 촬영 포인트도 있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예비신부와 검은 턱시도를 걸친 예비신랑이 연두색 새싹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배경으로 신비로운 느낌의 웨딩사진을 찍는 곳으로 이곳에 서면 누구나 모델이 된다.

반곡지는 보는 위치와 시간에 따라 느낌도 제각각이다. 복숭아밭 한가운데에 위치한 폐가의 옥상에서 보는 반곡지는 복사꽃과 왕버드나무가 어우러져 보기 드문 풍경을 연출한다. 복숭아밭과 저수지가 만나는 곳은 수면에 비친 왕버드나무가 그림자처럼 보이는 곳. 아스팔트 도로 갓길에 서면 줄지어 있는 왕버드나무 군락의 원근감이 생생하다.

이름 있는 저수지만 250여개에 이르는 ‘저수지의 도시’ 경산. 사라호 태풍 등 모진 풍파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을 꿋꿋하게 버텨온 왕버드나무 고목이 독립투사 김용규 목사의 애국정신처럼 날이 갈수록 푸르름을 더하고 있다.

경산=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