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조미자] 아름다운 비상등

입력 2011-04-19 17:32


비상등을 켠 차가 천천히 가고 있다. 차 한 대가 비상등을 켠 차를 따라가고 있다. 물결처럼 휩쓸려 가는 차들 사이에서 앞을 인도하는 비상등을 보고 있으니 문득 수필 쓰는 P선생님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내가 포구에서 근무할 때 출판사에서 선생님을 만났다. 그는 도시에서만 교직생활을 했다며 내가 근무하는 곳에 가면 안내해 주겠느냐고 했다. 엉겁결에 대답을 한 후 나는 포구의 약도와 기차 시간을 적어 보내고 홀가분해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미 포구에 왔다가 내가 있는 곳을 찾지 못한 채 돌아갔다고 했다. 송구스런 맘에 선생님을 청했다. 송도행 열차를 타고 갈매기 소리를 들으며 바닷가를 보여주었다. 선착장으로 향하려는데 선생님은 마다했다. 다음에 들르겠다는 거였다. 언제 또 오겠느냐고 하자 “조 선생은 봄꽃을 닮았군” 하며 웃었다. 잎이 나기도 전에 꽃부터 피는 꽃, 조급함을 버리고 깊이를 가지라는 일침이었다.

며칠 후 선생님은 고마움의 정표로 동시가 있는 달력을 보내왔다. 나와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꿈을 위해 보낸다는 사연도 덧붙였다. 달마다 때 묻지 않은 시구를 읽으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목련꽃이 떨어지면 봄이 간다고 서운해했는데 달력을 넘기며 목련은, 봄은, 내 안에 있다는 걸 알았다.

그해 여름 서울에서 선생님을 만났다. 지리에 어두운 나는 무작정 선생님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선생님은 갑자기 굳은 표정으로 “조 선생도 적지 않은 나이야. 앞장설 줄 알아야지” 하며 길 한복판에 멈춰 섰다. 습관처럼 남의 뒤만 따르던 내가 이제는 앞에 서야 할 위치라니. 묘한 기분이었다. ‘적지 않은 나이’라는 말도 의미심장하게 들려왔다. 그 한마디로 나는 앞으로 남은 날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마다 선생님을 찾았다. 나이 차가 많은 탓일까. 기성세대의 관념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도 많았다. 그러면 그는 다음에 올 때는 회초리 한 대 꺾어오라고 했다. 늘 종아리를 걷으라고 역정을 내던 아버지는 이 세상에 없고, 다 큰 딸을 어쩌지 못해 한마디 하는 어머니는 기력을 잃은 지 오래였는데 회초리라는 말은 내게 생생한 전율이었다.

돌아오는 길, 선생님과 전철을 탔다. 선생님 앞에 앉은 남학생이 자리를 양보했다. 선생님은 앉기를 주저했다. 내가 의아해하자 “젊은이에게 좌석을 양보 받을 만큼 나는 그들에게 뭘 했나 생각해 봤어요” 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동호대교의 기명색 노을에 선생님의 턱수염이 은빛으로 반짝였다.

모래알처럼 수많은 사람들 중에 만난 인연, 선생님은 내게 어두운 길을 안내하는 비상등 같은 존재였다. 이 다난한 세상에 나를 채근하고 일으켜준 사람이 어찌 선생님뿐인가. 홀로 서게 도와준 분들을 더듬어 보니 신이 아직도 나를 구원하고 있다는 든든함이 앞섰다. 그들은 한때를 지나고도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사람들이다. 나 또한 그들처럼 진정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는 법을 배우고 싶다.

조미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