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일자리 앞에 ‘유럽 다문화 포용정책’ 무너졌다
입력 2011-04-19 17:48
‘빅3’ 英·佛·獨 등 실패 선언 잇따라
프랑스 남부 아비뇽에 사는 켄자 드리데(32)는 지난 11일 공공장소 부르카 금지법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파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드리데는 니캅(눈만 노출시키는 이슬람 여성의 얼굴 가리개)을 쓰고 있었다. 드리데는 “이 법은 내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흥분했다. 그녀의 남편 알랄은 “내 아내는 13년간 니캅을 썼지만 아무에게도 충격을 주지 않았다”며 “이 법을 따르려면 아내는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하는데 이게 말이 되는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유럽 전역에서 이민자와 각국 국민 간 삐걱거리는 소리가 커지고 있다. 최근 들어 중동·북아프리카의 민주화혁명 속에 정치적 혼란을 피해 유럽으로 가려는 난민이 급증해 남부유럽 국가들의 현안이 됐다. 네덜란드·스페인에서도 급격히 반이슬람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
유럽의 ‘빅 3’인 영국 프랑스 독일은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실패’를 선언했다. 유럽회의도 이에 동조했다. 토르뵤른 야글란 유럽회의 사무총장은 “다문화주의 탓에 국가 안에서 ‘별개 사회’들이 성장하고 있다”면서 “일부 별개 사회는 위험하고 급진적인 생각을 전개하고 있다”고 밝혔다. 과연 유럽에서의 다문화주의 정책은 실패하고 만 것인가.
◇영국, 출생자 8명 중 1명이 이민자 후손=최근 이민자수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지난해 영국에서 태어난 8명 중 1명은 이민자의 후손이라고 일간 텔레그래프가 지난 15일 보도했다. 이는 영국 전체 인구의 11%를 넘는 것으로 최근 20년 새 2배나 증가한 것이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지난 14일 “영어를 못하거나 영국 사회에 통합될 의지가 없는 이민자들이 우리 사회에 불편과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주 타깃은 무슬림이었다. 앞서 캐머런 총리는 지난 2월 “영국에서의 다문화주의가 실패했다”고 선언했다.
영국 사회는 과거 30년간 젊은 무슬림들이 극단주의에 쉽게 빠져들었고, 이들이 주류문화와 동떨어진 상황이 돼버렸다고 인식하고 있다. 캐머런 총리는 정부가 나서 이민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영국적 가치를 받아들이도록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또 영국적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무슬림 단체에 재정지원 삭감을 공언했다.
◇프랑스, 더 이상 ‘톨레랑스(관용)’는 없다=프랑스는 2005년 전국적으로 이민자 집중 지역에서 발생한 폭동 사태로 이민자 정책의 전환점을 맞게 됐다. 프랑스는 지난해 집시 수천명을 추방한 데 이어 최근엔 이민자 수용 쿼터를 연 20만명에서 18만명으로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실업자 수가 300만명에 달하자 내국인 일자리를 위협한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지난 11일부터 여성들의 부르카 금지법이 시행된데 이어 17일엔 튀니지 이민자와 이들을 후원하는 운동가들이 탄 열차의 입국을 막아 논란을 일으켰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지난 2월 국민과의 대화에서 “프랑스에서 다문화주의 정책은 실패했다”고 규정했다. 그는 “우리는 그동안 우리나라에 이주하는 사람들의 정체성에 대해 신경 썼지만, 정작 이들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정체성에 대해선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르코지는 다문화주의와 관련 500만∼600만명의 무슬림을 특정하면서 “이슬람은 인정하지만 ‘프랑스식 이슬람’이 아닌 ‘프랑스 안에서의 이슬람’은 반대한다”고 천명했다.
사르코지가 반이민자 정서를 부쩍 강조하는 건 내년 5월로 다가온 차기 대선과 무관치 않다. 두터운 지지층인 우파를 끌어안기 위해 소수인 이민자, 특히 극단주의로 비칠 수 있는 무슬림과 거리를 두려는 것으로 분석된다.
◇독일, 이슬람은 독일 문화의 일부가 아니다=독일은 부족한 노동력 보충을 위해 그동안 과감한 이민정책을 펴왔다. 그러나 경제위기를 맞으면서 독일 지도자들 사이에는 독일 사회를 더욱 결속시킬 필요성이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메르켈 총리는 지난해 10월 “다문화 사회로 공존하자는 접근은 완전 실패했다”며 “독일어를 못하는 사람은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독일 보수 강경파인 한스-페터 프리드리히 내무장관은 지난달 취임 직후 “이슬람은 독일 생활방식의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라고 분명한 선을 그었다. 최근엔 북아프리카 지역 출신 난민의 독일 입국을 막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간 국경 통제도 할 수 있다고 언급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확산되는 반이민정책=반이슬람 정책을 주장하는 ‘진짜 핀란드인’당이 지난 17일 총선에서 약진하면서 핀란드 이민정책의 강경 보수화가 예상된다. 네덜란드 의회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3개월 이상 실직 상태가 되면 강제추방령을 내리는 법안을 상반기 중 상정할 예정이다. 이 법안에는 이중국적 폐지, 네덜란드어 시험통과 기준 강화 등도 포함돼 있다.
2008년 금융위기 후 실업률이 20%대로 치솟은 스페인은 외국인 무직자들에게 ‘자진출국 유인제도’를 추진 중이다. 3년 안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면 편도 항공권을 제공하고 1만 달러 이상의 출국 비용을 지원하는 내용이다.
한승주 기자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