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찬영 (13) 한센병 환자 집회서 주님의 섭리 깨달아
입력 2011-04-19 18:05
한센병 환자 특별집회를 위해 들판에 가건물이 세워졌다. 허름한 건물이었지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갈급한 심정이었다. 나는 담대하게 말씀을 전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누구라도 주님은 따뜻한 손길과 사랑으로 맞아주시고 주님 안에서 참된 평안과 용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선포했다.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주님을 기억하라고 강권했다.
이 말씀을 전할 때 한두 사람이 흐느끼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집회 장소가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그들은 마음속 깊숙이 담아 두었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리처럼 버림받고, 저주받은 사람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당신을 위하여, 소외된 사람을 위하여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기 원합니다.” “저도 믿을 수 있나요?” 여기저기서 주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그들은 눈물로 감사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살아계신 주님이 그들을 뜨겁게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경험했지만 나는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것은 식사시간이었다. 나는 한센병 환자들이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눈이 먼 사람, 코가 떨어져 나간 사람, 얼굴이 일그러진 흉측한 사람들이 노래하면서 즐겁게 식사를 준비했다. 그들이 사용하는 그릇을 보니 정말 새카맣고 더러웠다. 금방이라도 세균이 우글거리며 단체로 기어 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당시 한센병에 대한 상식이 별로 없었다. 환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다만 그들이 만든 음식에 대해 꺼림칙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선교사로서 그들의 정성을 무시할 수 없어 주는 대로 먹기로 했다. 그들이 마련한 음식을 먹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느 때보다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를 지으며 태연하게 식사를 했다. 속사정을 모르는 그들은 나를 선교사의 표본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 내가 겁에 질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의 길은 멀고 험하다. 동료 선교사들은 나에게는 귀한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처음 선교사로 나가 시행착오를 거듭할 때마다 하나님은 적절하게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고, 그들을 통해 협력선교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셨다.
나는 첫 안식년을 미국에서 보냈다. 미국 피츠버그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면서. 1960년대 미국은 실로 부강한 나라라는 사실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새로운 학문을 배우며 나름대로 도전받는 시간이었다.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은 나는 다시 선교지인 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며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어느 날 뉴욕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과 통화를 했다. 1962년 3월 23일이었다.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미국 성서공회연합회 총무 라톤 홈그렌입니다.”
“무슨 일이죠?”
“최 목사님을 좀 만나고 싶습니다.”
당시 피츠버그에는 미국인 장로교회가 많았다. 피츠버그 지역 장로교회들은 내가 그 부근에 있는 유일한 한국인 장로교 선교사였기 때문에 집회를 인도해 달라는 요청을 많이 했었다. 이 때문에 이번에도 집회를 부탁하려는 만남 정도로 여기고 별 생각 없이 만나기로 약속했다.
정리=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